청주해피마인드 아동가족 상담센터 소장

최근에 ‘택시 운전사’란 영화를 보았다. 영화를 본 주변 사람들의 이래 저래한 소감을 들으며 궁금증이 일기도 했지만, 영화 ‘군함도’를 보고 나서의 실망감이 컸던지라 이제 스크린을 전매하는 영화는 그만 봐도 좋겠다고 다짐하고 있던 차였다.

때마침, 서울에서 친구가 여름휴가를 왔다. 저녁을 먹고 무심천을 산책하다 우리 영화나 한 편 볼까 하는 말이 나왔고, 친구도 나도 보지 않은 영화가 ‘택시운전사’였다. 우리는 편의점에 들러 아이스커피 하나씩을 들고서 영화관으로 향했다. 막상 영화관에 친구와 앉으니, 혼자서 영화를 볼 때와는 다른 느낌이 있었다. 약간의 설렘과 기대감이 일어났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가 오버랩 됐다. 소설을 읽으며 내가 머릿속으로 그렸던 장면이 영화 속 장면보다 더 생생했었나 보다. 영상은 직접 감독이 보여주는 앵글만큼 관객에게 다가간다면, 활자가 주는 정서는 좀 더 사적이고 구체적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소년이 온다’를 읽으며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기 힘들었었다.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이 스며들어 그해 오월이 그대로 내 안으로 들어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만나는 인물들에게는 눈물이 아닌 불편한 감정이 일었다. 무엇 때문이어서일까? 이 불편함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광주 민주 항쟁을 소재한 영화는 몇 편 만들어졌었다. 용기 있는 작업이었다고 생각한다. 직접 경험하고 그 시대를 살았으며 여전히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치열함을 영화가 담아내기는 여전히 역부족이었을까? 현실이 영화 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나는 인간다움을 규정하는 요소로 정의로움을 꼽는다.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기 전에 이 사적인 것이 다수의 누구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자국민을 향해 총을 겨누고 발포한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고, 많은 사람이 이유도 없이 죽어 나갔다. 거기에 대한 이해할만한 설명도 되지 않은 채 넘어간 세월이었다.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오욕의 세월을 우리는 살아온 것이다. 5·18은 우리 역사에서 미궁의 블랙홀 같은 것이다.

‘택시 운전사’ 송강호의 대사처럼 배따지가 불려서 우리나라가 얼마나 좋은 나라인지 모르는 것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데모질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었던 당시의 다수의 사람에게 이 영화는 어떻게 다가갈까? 영화 속 그들은 폭도도 빨갱이도 데모꾼들도 아닌 그냥 일반인이었다. 구두 닦기 청년, 노점상, 버스, 택시 운전사, 중 고등학생, 대학생,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상인들, 세탁소 아저씨, 그냥 우리의 일상의 풍경들에서 눈을 돌리면 이웃으로 같이 숨 쉬는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폭력에 침묵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그 폭력으로부터 그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폭력이 지금은 다른 누군가를 겨누고 있지만, 나 역시도 그 폭력의 희생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일은 광복 72년이 되는 날이다. 광복이라는 말만 들어도 울컥 올라오는 뜨거움의 정체는 아무래도 우리의 세포 안에 치욕스러운 역사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 온몸으로 저항했던 투쟁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광주는 여전히 살아있는 우리들의 민주주의 현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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