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진천서 순국 100주년 학술대회

‘헤이그 특사’인 독립운동가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1870~1917) 선생이 현재 가치로 100억원 이상 재산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으로 밝혀졌다.

충북대 사학과 박걸순 교수는 북간도 서전서숙(瑞甸書塾) 개설 등 연해주 일대 전방위적인 독립운동을 주도한 이상설 선생의 독립운동 자금 규모 등을 파악해 관심을 끌고 있다.

박 교수는 14일 진천에서 열리는 ‘이상설 선생 순국 100주년 기념 전국학술대회’에서 발표할 논문 ‘보재 이상설의 독립운동론과 독립운동’에서 학계 최초로 이상설 선생의 독립운동 자금 규모를 파악했다.

박 교수는 1901년 작성된 대한제국 시기 토지대장인 ‘충북도 진천군 양안(忠淸北道 鎭川郡 量案)’을 전수 조사·분석해 이상설 선생의 토지 소유 현황을 파악했다.

이에 따르면 이상설 선생은 진천군 내 남변면·북변면·초평면·월촌면 등 4개 면에 19.7정보의 토지를 소유했다.

현재 가치로 80억~100억원을 호가하는 재산으로, 당시 진천군 상위 지주 18위에 해당하는 대지주였다.

이 가운데 논이 47필지에 7결31부5속이고, 밭이 25필지에 3결37부4속이며, 대지가 11필지에 70부1속이다. 토지에는 기와 1채와 초가 10채 등 11채의 가옥이 있었다.

극빈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난 이상설 선생이 대지주였다는 사실은 양아버지 이용우(李龍雨) 소유의 토지를 물려받은 것으로 박 교수는 짐작했다.

선생은 7살에 상경해 고향 진천과 인연을 끊은 것으로 이해했으나 이들 재산을 고리로 망명 직전까지 30여 년간 고향과 연계했음이 확인됐다.

하지만 선생은 고향 문중에서의 평판은 그리 좋지 않았다.

‘나랏일’에 쓰기 위해 돈 떨어질 때마다 와서 고향의 전답을 팔아가서 모두 없애버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독립운동사에서 독립운동가의 군자금으로는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李會榮·1867~1932) 선생 형제의 600억원이 알려졌으나, 이상설 선생의 재산 현황 파악은 독립운동가의 군자금을 밝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박 교수는 이번 논문에서 선생의 순국일도 바로잡았다.

이상설 선생은 그동안 1917년 4월 22일 러시아 니콜리스크 우수리스크에서 병사한 것으로 알려져 해마다 이날에 맞춰 추모제가 진행됐다. 하지만 박 교수는 일제의 기밀문서와 당시 언론 보도를 통해 선생의 순국일을 4월 1일로 수정해야 할 것을 주장했다.

일제는 선생이 폐 질환으로 대년병원(大年病院)에 입원·치료를 받다가 4월 1일 오후에 사망했다고 구체적으로 보고하고 있다.

‘매일신보’ 4월 17일 자에서도 선생이 ‘신병에 걸려 음력 윤 2월 10일 시베리아의 니콜라에프스크에서 사망해 4월 15일 경성의 아우에게 부음이 도착했다’고 보도했다. 음력 윤 2월 10일은 양력으로 4월 1일이다. 이 같은 보도는 ‘신한민보’ 5월17일 자에서도 전하고 있다.

박 교수는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의거의 실질적 배후이자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 형성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이상설 선생임도 입증했다.

일제는 안 의사의 의거 후 연해주 지역 관련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최재형(崔在亨·1858~1920) 선생과 함께 이상설 선생에게 혐의를 뒀다.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조선의 독립이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를 가져온다’는 이상설 선생의 동양평화론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게 박 교수의 견해다.

이상설 선생이 안중근 의거를 주도한 실질적 배후로 평가했다.

박 교수는 선생이 1914년 대한광복군정부의 정통령(正統領)에 추대된 것과 관련해서는 대한광복군정부가 임시정부가 아니고 의병적 조직의 독립군적 전환 단체로 평가하면서 정통령을 국가수반이 아닌 군사 지휘자로 해석했다.

선생이 연해주 한인사회의 화해와 통합의 주창자임도 밝혀냈다.

일제는 연해주 한인사회를 이범윤(李範允), 이갑(李甲), 최봉준(崔鳳俊), 정순만(鄭淳萬) 등 유력한 파의 수장 휘하와 어느 파에도 속하지 않은 자 등 5개 파 또는 경성파(서울), 서파(평안도), 북파(함경도) 등 지역 3개 파로 구분했다.

이상설 선생은 이런 연해주 한인사회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고, 1911년 권업회(勸業會) 창립이 그의 심복인 청주 출신 정순만의 피살 사건을 계기로 결실을 거뒀음도 규명했다.

이는 기존 연구에서 완전히 간과된 사실로 한국독립운동사 해석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된다.

박 교수는 “이상설 선생은 한말~1910년대에 광폭의 공간을 무대로 전방위적인 독립운동론을 실천하고자 노력한 대표적 독립운동가이지만 다른 독립운동가에 가려 지나치게 저평가되거나 잘못 이해된 부분이 적잖다”고 말했다.

이어 “러시아극동문서보관소 소장 자료 등 러시아 관헌자료를 거의 이용할 수 없어 추론에 그친 부분이 적잖은 것은 연해주 한인 독립운동사 연구에 여전히 남아 있는 큰 공백”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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