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수필가

문지로 올라가 성내를 돌아보았다. 서벽을 돌아 북으로 돌아보았다. 북으로 가기 전에 광장이 있고 백제부흥군 영혼을 위로하는 제단이 있다. 제단에서 살피면 성의 한가운데는 불룩 산처럼 솟았다. 흙으로 쌓아 장대를 만든 것인지 애초에 있는 산봉우리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올라가 보았다. 평평하고 두두룩하다. 마치 소잔등 같다. 이곳에 건물도 있었으리라.

장대에서 내려와 동쪽 성벽으로 가 보았다. 남벽과 서벽이 200m 쯤 되는데 비해 동벽은 짧다. 기록에 보면 100m가 조금 안된다고 한다. 이 성은 테뫼식 산성이면서 산봉우리를 비스듬히 안고 돌아 가운데가 잘록하게 들어가 마치 누에고치 모양이다. 눈이 어두워서 더 자세한 것이나 특이점이 발견되지 않았다. 동벽은 흙더미 속에 감추어진 돌이 겉으로 몇 개씩 드러나 있다. 그 위에 아름드리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만약에 나무를 베고 흙을 벗기면 어떨까? 그 안에 천오백 년 성벽이 고스란히 드러날 수 있을 것인가? 성안의 평평한 부분에 기와 조각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아마도 이 부분에 매우 큰 건물이 있었던가 보다, 와편과 토기편을 모아 보았다. 기와는 겉과 속이 다 회색이다. 빗물에 닳고 닳아 만질만질하다. 뒷면에 빗살무늬 같은 무늬가 있다. 토기 조각은 겉은 짙은 갈색이고 깨진 단면은 붉은 황토색이다. 무늬가 있지만 무늬를 통하여 시대를 짐작해내는 재주가 내게는 없는 것이 아쉽다.

그냥 1500년 전 그 아스라한 시대에 이곳에 우리랑 똑같이 근심 걱정 많은 이들이 지키고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뿐이다. 고향을 떠나 이곳에 주둔했거나 이 아랫마을인 백곡리나 지곡리 사람들이 이곳에 머무르며 백제의 혼을 지키려고 목숨을 걸었을 것이다. 밤이 되면 산 아래에서 먹을 것을 이고 올라와 남정네에게 먹이고자 하는 젊은 아낙도 있었을지 모른다. 북에서 핵 공격 위협이 있듯, 남쪽 신라에서 서쪽 당에서 북쪽 고구려에서 군사가 몰려 달려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며 밤을 새웠을지도 모른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사비성에서 병관좌평으로 있던 정무장군이 왕자 충순을 모시고 신라의 품일장군에 대항해 38일간이나 버티다가 함락됐다고 한다. 정무장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사비성 부근까지 공격해서 나당연합군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또한 진현성(대전)도 공격하여 사비성을 고립시켰다. 신라의 김유신 장군은 편지를 보내 항복하면 죽이지 않고 벼슬을 주겠다고 회유했으나 정무장군은 단호히 거부하고 끝까지 싸워 이들을 퇴각시켰다. 그러나 주류성 지도부의 내분으로 부흥백제가 지리멸렬해지자 정무장군의 군사도 모두 흩어졌다. 주민들로 이루어진 부흥백제군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곳 주민들의 성향 또한 외세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아마도 지역에서는 이 사실을 두고 부흥백제의 거점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슬픈 역사를 지니고 있는 성이다.

이 성을 따로 찾아오기를 잘했다. 여기서 지역 주민의 외세에 대한 강한 저항의식을 발견했다. 지역이 나라의 기틀이라면 이것이 곧 애국이라고 생각한다. 서기 663년 4월 19일 이 성이 함락됐고, 이 날을 기려 위령제를 지낸다고 한다. 내려오는 길에 마을을 지나며 옛 부흥백제의 모습을 생각하니 씁쓸한 마음 둘 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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