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해피마인드 아동가족 상담센터 소장

우리집에는 아직 에어컨이 없다. 삼 년 전에 이사온 집은 비교적 맞바람이 잘 부는 집이다. 이사를 가면서 집주인은 에어컨을 두고 가고 싶어 했으나 나는 이들의 호의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더울 때는 조금 덥게, 추울 때는 조금 춥게 지내는 것이 몸에는 좋다는 생각을 고집하고 싶었다.

이런 내 생각을 동의해주었던 아이들도 올여름은 견디기 힘든 모양이다. 방학하고 집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많아진 아이가 진지하게 내게 제안을 한다. 내년 여름방학은 시원하게 보내고 싶다고. 친구들을 초대하고 싶어도 에어컨이 없는 집에 누가 오느냐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몸에서 분비되는 땀의 양도 많아졌다. 조금 덥게 지내려고 하는 나에게도 여름은 불편한 계절이 됐다. 다른 계절과는 다르게 의욕도 떨어졌다. 나의 의욕 상실과는 달리 여름은 갈수록 본연의 의무를 다하듯 30도를 넘으며 맹렬하게 더위를 과시하고 있다.

그나마 나에게는 여름을 견디게 하는 것들이 있다. 수박과 여름밤의 정취(情趣)이다.

여름밤은 다른 계절의 밤과는 다른 정취가 있다. 뜨겁게 달군 대지의 열기가 조금씩 내려가면 온종일 더위를 피해 건물 안에서 갇힌 몸을 여름밤은 밖으로 이끌기도 한다.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고픈 마음을 일으키기도 하고, 디스코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픈 열정을 기억하게 해주는 추억도 있다. 밤 산책하기에도 좋고, 가까운 사람들과 마시는 맥주 맛도 그 어떤 계절에 마시는 맥주 맛보다 좋다. 여름밤만큼 심야 영화를 보기에도 좋은 계절은 없다. 역시 밤은 여름밤이 최고다.

나는 과일 중에서 수박을 제일 좋아한다. 여럿이 먹어야 더 맛있는 과일이 수박이다. 웬만한 어른의 머리보다 큰 수박에 칼을 대기만 해도 잘 익은 수박은 ‘쫙’하고 그냥 쪼개진다. 속이 빨간 수박에 콕콕 박혀있는 수박씨는 군침을 돌기에 충분하다. 어릴 때, 한여름 마당 한가운데 수돗가 옆에 물을 받은 대야에 수박 한 덩이를 동동 띄어놓고,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돌아오시기를 기다렸다. 해질녘 고된 노동을 끝내고 돌아오신 아버지가 식사를 마치고 평상에 자리를 잡고 앉으시면, 어머니께서는 밥상만 한 둥그런 양은 쟁반에 수박에 썰어 오셨다. 어머니께서는 수박을 많이 먹으면 자다가 오줌을 싼다며 적당히 먹으라는 잔소리를 잊지 않으셨지만, 우리는 어머니의 잔소리를 뒷등으로 들으며 누가 더 수박을 빨리 먹는가를 시합하기에 바빴다. 우리는 수박씨를 몸 어딘가에 붙이고 잠이 들기 일쑤였다.

퇴근하는 길에 나는 수박 한 덩어리를 샀다. 저녁을 먹은 후에 냉장고에서 수박 꺼내와 아이들과 둘려 앉았다. 다행히 수박은 잘 익었다. 빨간 단물이 뚝 뚝 떨어지는 수박을 맛있게 먹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수박과 에어컨은 어울리지 않은 조합이라고 말을 꺼냈다. 에어컨 아래에서 먹는 수박 맛은 다르다고, 수박을 맛있게 먹으려면 땀도 흘리고 여름의 끈적임을 감수해야 한다고. 그렇게 먹는 수박이 최고라고, 내년 여름에도 우리 수박 맛있게 먹자고 하자, 엄마의 말이 어이가 없었는지 아이들 입에서 잔 한숨이 나온다.

때마침 베란다 창문으로 바람이 불려온다. “아 시원해” 말을 동시에 하며 우리는 웃었다. 바람은 계절에 따라 달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하고 뜨겁기도 하다. 다양한 바람의 색깔을 만나는 기쁨을 맞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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