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명궁(名弓)들은 과연 어떤 심리적인 상태에서 활을 잘 쏘았을까. 선인들은 마음의 동요가 사라지고 없는 무심지경(無心之境)이라고 한다. 즉, 활과 나와 과녁이 하나가 된 무심상태라고 했다. 명궁이 되기 위한 수련과정은 예나 지금이나 보통 사람들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의 연속이다.

옛 기록에는 베틀 아래 누워 좌우로 오가는 실북을 응시하길 몇 년을 해야 하는데 수련의 경지가 깊어질수록 베틀이 좌우로 오가는 이동의 폭이 줄어들어 북이 움직이지 않고 고정돼 마치 확대경을 통해 보는 것처럼 커진다는 것이다. 즉, 유심(有心)이 작동해 갈등을 일으키는 상태가 제거된 마음과 대상이 합치된 무심지경, 선(禪)의 경지를 말한다.

명궁의 수련과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작은 것이 크게 보이게 하기 위해 머리카락에 ‘머릿니·벼룩’을 묶어 놓고 눈이 아프지 않고 깜박거리지 않는 합심지경(合心之境)에 이르기까지 하루 종일 들여다보길 몇 년은 더 해야 된다.

이 쯤 돼서야 그 사물이 마음과 같게 되고 그 머리니·벼룩이 축구공이나 말(馬)처럼 크게 보이는 오묘한 경지에 도달한다고 한다. 여기다 활시위를 잡아끄는 오른팔 위에 물을 담은 사발을 얹어놓고 팔 떨림은 물론이고 수면에 미동을 일으키지 않는 수련에 들어간다.

지체(肢體)의 움직임은 물론 숨소리와 오장육부까지도 마음으로 조정시키는 수도의 경지인 무심지경을 터득해야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오죽하면 활을 쏘는 것이 아니라 도(道)를 닦는다고 했을까.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한 남녀 궁사(弓士)들이 메달을 쓸어 담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활의 36부위에 힘을 균배하는 옛 명궁들의 무심지경에다 그들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다. 한국 양궁선수들은 베틀아래 눕지 않았고, 머리카락에 머리 이·벼룩을 묶어놓고 몇 년의 수련과정은 거치지 않았지만, 바람이 거센 곳에서, 소음이 많은 곳에서 훈련을 받았다.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에서 월계관을 쓴 충북출신의 박경모 선수(29)가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그가 돗수 높은 선글라스를 끼고 남자 단체전에서 ‘금메달의 과녁’을 명중시킨 것은 국가대표가 된지 11년 만의 쾌거이자 한국인의 자긍심을 심어줬기 때문이다. 박 선수는 선수생활을 오래하다 보니 시력이 떨어졌다.

그래서 경기 때마다 과녁을 겨냥하는 시간이 다른 선수에 비해 길다. 지난 22일 대만선수와 단체결승 당시 부친 박하용씨(60)는 양궁의 소질과 기량을 충분히 겸비하고도 활을 잡고 과녁을 겨냥하는 시간(인터벌)이 길어지자 “경모가 활 쏘는 시간이 너무 걸린다. 저 것을 줄여야 할 텐데…”를 연발하며 가슴을 졸였다.

올림픽에 처녀 출전한 박 선수는 이원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활을 잡기 시작해 고교 때 두각을 나타내면서 청주상고 3학년 때 국가대표가 됐다. 그는 세계 각종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었지만 대표선발전에서 번번이 탈락해 올림픽과는 인연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타고난 불굴의 승부기질은 꺾지 못했다. 박 선수는 마침내 개인 8강 탈락의 아픔을 딛고 그리스 아테네에서 ‘대기만성의 신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번 올림픽에서 42세의 나이에 남자 개인전에서 세계랭킹 1위인 임동현(충북체고)을 꺾고 은메달을 딴 야마모토가 일본의 영웅이 됐다. 그가 에도시대(1584 ~1654) 니텐이치류(二天一流) 검법의 시조인 미야모토 무사시 요시쓰네(宮本武藏義桓) 등 칼을 잘 쓰는 조상의 피를 거부하고 활을 잡았다는 점에서 그의 선조가 한국인이 아닌가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박 선수가 활을 놓지 않는다면 옛 명궁의 무심지경을 이어받기만 해도 야마모트의 대기만성을 뛰어넘어 ‘박경모의 신화’가 ‘쭈욱~’계속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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