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는 이미 넘어간 지 오래였고 잔 빛을 머금은 강물만 옅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언제나 저렇게 묵묵하게 흘러가는 것을 보면,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 것은 저 강물뿐이구나.”

우갑 노인이 거무스레해져가는 강물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언제나 묵묵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무섭습니다!”

풍원이가 청풍 물골에서 있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우갑 노인의 말에 토를 달았다.

“허허, 그 녀석! 네 말이 맞다. 항상 좋기만 하겠느냐. 우여곡절이 지나간 다음에야 평안해지는 법이지. 그래, 오늘 내창장에서 본 것이 없더냐?”

“많습니다요.”

“그래? 뭘 그렇게 많이 봤는지 어서 얘기를 해 보거라!”

궁금해진 우갑 노인이 풍원이를 재촉했다.

“일단 큰 장사를 해야 되겠다는 것 하고, 내 물건이 없이도 장사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요.”

“큰 장사는 뭐더냐?”

“소 같이 큰 것들을 팔아야 돈도 많이 벌 수 있을 것 같습니다요.”

“내 물건이 없이도 장사를 할 수 있다는 말은 뭐더냐?”

“오늘 내창장을 돌며 보니 자기 물건 하나 없이 입만 가지고 먹고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어요.”

“장사가 무엇이겠느냐. 물건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물건을 팔아 돈을 버는 것 아니겠느냐? 단순하지만 그게 장사의 핵심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사람도 많고 물건도 많단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 눈도 다 제각각이고 이 세상에 똑같은 물건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흥정이 이뤄지고 거래가 성사되는 것이다.”

“그건 알겠지만, 쇠몰이꾼, 쇠살주, 말뚝배기, 남새전에 아낙이 제 물건도 없이 남의 물건을 이리저리 소개해주고 돈을 번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요.”

“조금만 찬찬히 들여다 보거라. 그들이나 우리나 별다를 것이 뭐가 있느냐?”

“그래도 우리는 우리 돈으로 남의 물건을 사서 전에다 풀어놓고 팔잖아요. 그런데 저들은 자기들 돈으로 물건을 사는 것도 아니고 전도 없고, 순전히 입으로만 떠들며 돈을 벌잖아요. 소주인처럼 힘들어 소를 멕이는 것도 아니고, 남새밭에서 땀 흘리며 채마를 키우지도 않았으면서 돈은 더 잘 버니 하는 말입니다요.”

“그들도 물건을 흥정해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게 전해주고 돈을 버는 것이고 우리도 그것은 마찬가지 아니겠느냐? 다만 우리는 전을 차려놓고 사람들이 필요로 하면 언제든 살 수 있는 것이고, 저들은 장날만 그 일을 하는 것 뿐 장사는 똑같은 것 아니겠느냐?”

“그래도 뭔가 확실하게 말씀은 드릴 수 없지만 제기 이제껏 생각하던 장사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을 느꼈고, 그냥 맨몸으로 장바닥에 나가도 굶지는 않을 것 같은 막연한 자신감이 생겼습니다요.”

그것은 풍원이의 솔직한 생각이었다. 이제까지 풍원이는 장사는 반드시 밑천이 있어야 하고 그 밑천으로 물건도 사고 전을 차려야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내창장을 둘러보며 어떤 장사든 방법만 배우면 맨 몸으로도 얼마든 돈을 벌수 있겠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그 녀석 참 용쿠나. 허드레장꾼처럼 그냥저냥 장바닥을 쏘댕기다 올 줄 알았더니 그래도 뭘 보기는 봤는가보구나.”

“어르신은 맨날 절 어린애 취급이시지만, 저도 장사밥 먹은 지가 몇 해쨉니다. 볼 껀 다 봅니다요!”

우갑 노인의 칭찬에 풍원이가 기가 살았다.

“장마당에 나오면 물건 수만큼이나 온갖 장사꾼들도 많다. 전만 해도 언뜻 싸전, 곡물전, 어물전, 남새전, 포목전, 약전, 유기전, 잡화전, 쇠전, 가축전, 나무전이 있다. 장사꾼만 해도 싸전에 마쟁이,되쟁이,강구,말감고,장감고,승수,짐방,임방꾼,짐꾼이 있고 곡물전에 벼팔리꾼, 과일전에 광주리장사, 동아리 장사, 가축전에 어리장사, 어물전에 노부꾼, 포목전에 떨이꾼, 나무전에 모꾼과 맛바리가 있고 떡 장사, 갓 장사, 체 장사, 방물장사, 국밥장사, 술 장사, 들병장사, 약 장사, 간거리 장사, 마병 장사, 꾸미 장사, 뜨내기 장사가 있다. 또 물건도 팔지 않으면서 장바닥을 돌아다니며 돈을 뜯어먹는 동냥패, 걸립꾼, 맥장꾼, 홀리꾼, 바람잽이까지 장바닥에 모여 있다. 이들 말고도 장바닥에서 먹고사는 사람들은 무수히 많다. 그들이 모두 밥을 먹고 사는 것은 각자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수완이 있기 때문이다. 풍원이 너는 장바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어떤 수완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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