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석 한국교통대 산업경영공학과 교수

트라우마 연구 전문가인 미국 컬럼비아 대학 임상심리학자 조지 보나노는 1990년대 초 부터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한 사람들의 정서 반응을 연구 했다. 그 당시 일반적인 통념은 가까운 친구나 가족이 죽게 되면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남는다는 것이었지만, 보나노는 실험을 통해 그런 통념과 달리 사별한 사람들에게서 마음의 상처가 생긴 흔적을 찾아낼 수 없음을 확인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사별 이 후 몇 달 만에 원래의 생활로 돌아갔으며 놀라울 정도로 환경에 잘 적응했다는 것이다. 회복 탄력성은 원상태로 돌아가는, 심리적 건강성, 절대 회복력, 탄력성 등으로 번역되는 개념이다. 휘었던 대나무가 되튕겨 일어나듯, 눌렸던 용수철이 금방 튀어오르듯, 슬픔과 고통에서 신속하게 벗어나 삶의 페이스를 되찾는 모습을 개념화한 것이다.

하버드대학 의대교수 조지 베일런트는 회복 탄력성을 지닌 사람은 신선하고 푸른 고갱이를 지닌 나뭇가지에 비유했다. 그런 나뭇가지는 휘어져 모양이 변형되더라도, 힘없이 부러지는 일 없이 금 새 다시 제 모습을 찾아 계속 성장한다. 유전자와 환경은 모두 회복 탄력성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우리는 사랑하는 친구들과 교제하면서 유머 감각이나 이타주의와 같은 적응적 방어기제를 발전시킨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마음을 끄는 능력은 많은 부분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능력, 즉 타고난 성격이나 외모에 좌우될 때가 많다.

회복 탄력성은 나이가 좀 들어야 발휘될 수 있기 때문에 10대들에게 과도한 경쟁을 요구하는 것은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10대의 나이에 살인적인 입시 경쟁에 내몰리는 한국의 학생들을 생각해 보자면 이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다. 패자부활전이 없거나 희소한 사회는 의도적으로 회복 탄력성을 억압하는 사회가 아닐까?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에게 재기할 기회는 있는가? 이런 물음과 관련, 사회적 차원의 회복 탄력성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어떤 사회에 재난이 닥쳤을 때 자기가 먼저 살기위해 도망치고 싸우는 아비규환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서로 돕고 연합하는 상황이 전개 될 수도 있다. 이 후자의 태도가 바로 ‘집단 탄력성’이다. 평상시 전 사회적 차원에서 집단 탄력성을 키우기 위해선 신뢰 등과 같은 ‘사회적 자본’이 튼튼해야 한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사회적 상처들을 치유할 수 있는 사회의 회복 탄력성이 갈수록 줄어들고, 그 탄력성이 발휘되기 어려운 임계점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점이다. 제대로 된 해법을 찾지 못하는 청년실업, 비정규직, 소득 양극화, 노인 빈곤문제 등은 구체적인 증거들이다.

개인 차원에선 자신의 회복 탄력성을 기르기 위한 노력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와 관련된 자기계발 산업은 날로 그 규모를 더해가고 있는 반면, 사회적 차원의 회복 탄력성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미국에서 자기계발 산업이 2000년 이래 매년 10%씩 꾸준히 성장되어 10년 만에 그 규모가 80억 달러에 이르고 있는 것도 그런 추세를 말해 주는 게 아닐까? 이런 ‘책임의 개인화’ 현상에 브레이크를 걸거나 그걸 보완하기 위해서라도 사회적 회복 탄력성을 높이는 정책적 개입이 있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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