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충주농고 교장 수필가

검푸른 녹음이 짙어가는 6월이 오면 꿈에도 잊지 못할 6·25의 참상을 상기한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우리민족의 최대비극인 전란으로 목숨을 바친 애국 장병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 충절을 추모한다.

때는 휴전 협정(1953년 7월 27일)이 체결되고 6년이 지난 1959년 3월 학보병으로 자원입대를 했다. 단기복무(1년6개월)를 하고 일찍 사회 진출을 하기 위함이었다.

논산 훈련소 3개월의 힘든 과정을 마치고 춘천 보충병 생활에서 채소 재배를 위한 강변 쑥대밭을 20여일 맨손으로 뽑았다. 손이 부르트고 피가 흘러 수건을 감고하던 일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지 못할 고생이었다. 민간부락에 동원되어 교회를 짓는데 큰 기둥나무를 산에서 베어 나르고 화목용 장작(長斫)을 산더미만큼 만들어 쌓아놓으면 군 트럭이 어디론가 싣고 간다. 이런 고된 노역 때문에 보충병5명이 탈영 한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2개월의 보충병 생활을 마치고 기다리던 부대 배속을 받았다. 받은 곳은 삼십 리 길 깊은 계곡을 따라 올라가 산 정상이었다. 이 지역에서는 제일 높고 악명 높은 향로봉(香爐峰)이였다. 6·25전쟁 때 25번이나 쟁탈전을 벌였던 곳이라 한다.

향로봉에 온지 13개월 만에 대대 작전과로 파견근무를 하게 됐다. 최전방 병사는 문맹인이 많아 학보병을 파견근무로 군 행정을 돕게 된 것이다. 그곳에는 나와 같은 학보를 받은 동료들이 있었다. 하는 일은 진지 투명도 작성, 진지 자재 장부정리, 차트작성이 주업무였다.

하지만 현장에서 본 진지는 한국산 육송인데 장부에는 전부미송으로 된 것을 육송으로 장부를 고치는 작업이다. 즉 고급 미송은 후방에 팔아먹고 전방 진지는 현지자재로 바꾸는 것이다. 참으로 엄청난 부정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모르는척하고 지나자니 가슴이 답답했다. 이러니 6·25때 전방이 허무하게 무너지고 불과 2개월 만에 대구, 부산까지 밀린 원인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향로봉을 떠나 온지 5개월 만에 제대복을 입고 귀향해 군 복무를 마쳤다. 꿈에도 잊을 수 없는 향로봉의 군 복무를 통해서 강인한 인내심을 배웠고,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군의현장을 생각하면 분노가 느껴진다.

향로봉에서 겪은 시련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어떠한 어려움이 있다 해도 이겨 낼 수 있는 저력을 가질 수 있었다. 따라서 향로봉 높은 산정에서 고생한 군복무를 영광으로 생각한다. 모두가 군 생활 이야기만 나오면 편하게 보낸 것을 자랑으로 말하지만 군 복무는 고생을 해야 삶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어느 군 장교의 말에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한다.

대한민국의 군은 절대 부패해서는 안 된다. 세계에서 으뜸가는 강군이 되어 민족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야한다. 67주년을 맞는 6·25동란의 참상을 회상하면서 자유와 평화를 지켜온 전몰장병들의 넋을 위로 하노라.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