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인 교수의 풍수칼럼]조선조 청백리 맹사성 고택
[김정인 교수의 풍수칼럼]조선조 청백리 맹사성 고택
  • 충청매일
  • 승인 2017.06.08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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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대 경영학과

위인들의 생애를 돌아보며 그들의 삶과 업적들을 돌이켜 보는데 세월이 달라도 그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은 그들이 살았던 유적지를 방문하는 것이다. 어느 나라를 가든 그 나라를 대표하는 위인들의 생가터나 주거지, 업적을 쌓았던 곳, 무덤 등을 보존하고 이곳을 통해 그들의 업적을 기리며 역사적 교훈을 배운다.

아산에 가면 설화산 아래 자리 잡은 조선조의 명재상 고불 맹사성(1340~1438)의 집터가 있다. 이곳에는 수령 600여년이나 된 은행나무가 있어 이곳을 맹씨행단이라고도 부르는데, 행단은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서 제자를 가르치는데서 유래했다.

맹사성 고택은 최영(1316~1388)장군의 집이었는데 맹사성은 최영의 손녀사위로 이 집을 물려받았다. 최영장군은 ‘황금을 돌 같이 보라’고 하는 청렴결백의 상징이었고, 맹사성은 조선조의 대표적 청백리였다. 2명의 청백리가 살고 간 집터, 어떤 특징이 있을까 풍수적으로 살펴보면 자연의 흐름과 조화된다.

맹씨행단은 설화산을 배산으로 배방산을 바라보며 금곡천이 우에서 좌로 횡류하는 북향명당이다. 북향의 터에서도 자연의 흐름보다 햇볕을 받기 위해 남향을 선호하는데 이곳은 자연의 흐름대로 북향으로 집을 지었다. 북향의 터에서는 북향으로 집을 짓는 것이 자연의 순리다. 이때에는 주산인 설화산이 남쪽에 있지만 북쪽으로 의제한다. 그리고 안산 배방산은 북쪽에 있지만 남쪽으로 의제한다. 뒤를 북으로 보고 앞쪽을 남으로 보고 집을 배치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시대를 대표하는 2명의 청백리가 살았다. 최영장군은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청백리이고, 맹사성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청백리다. 자연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았다.

세종(1397~1450)시대 좌의정을 지낸 맹사성은 북촌마을에 살았다. 북촌마을에 가면 맹사성의 집터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데 이곳은 북촌마을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높은 곳은 기운을 나누어주는 관공서, 교회, 학교 등이 잘 맞는 곳인데 맹사성은 북촌마을의 가장 높은 언덕에 살았다. 이곳에서는 경복궁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고 왕의 침실이 있는 강녕전에서도 이곳이 바라다 보이는 곳이다. 세종대왕, 맹사성 모두 책을 많이 보기로 유명한데 맹사성 집의 불이 꺼지지 않으면 세종대왕도 자지 않고 책을 보았다고 전해질 정도로 유명한 곳이다.

이제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서 재상을 뽑는 청문회가 열리고 있다. 어떤 재상을 뽑을 것인가? 재상의 기본 덕목 중 청렴결백은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 같다. 부정에 유혹되지 않고 백성을 위해 일하는 사람 위민재상을 뽑아야 할 때다. 그래서 청와대 대통령이 집무하는 곳도 위민관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고려시대의 대표적 청백리 최영장군, 조선시대의 대표적 청백리 맹사성 유적지를 찾아 그들의 삶을 돌아보며 위민정신으로 나라를 다스려 주기를 소원한다.

바라건데 자연의 흐름, 시대의 흐름을 거역하지 말고 미래로 나갈 수 있는 지도자가 뽑혀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백성들과 소통하며 다양한 의견들을 통합하는 지도자가 나오기를 바란다. 그래서 100년 뒤, 500년 뒤에도 존경받고 표상이 될 수 있는 위민의 정치가 펼쳐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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