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너 글은 언제 배운 것이더냐?”

“…….”

풍원이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네가 물산 창고마다 붙여놓은 물품 목록을 보니 서당에서 천자문은 배웠는가보더구나.”

“…….”

풍원이는 끝내 우갑 노인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참으로 대단한 놈이다. 그렇게 떠돌아다니면서 글은 언제 깨쳤단 말이냐?”

사정을 모르는 우갑 노인은 글을 할 줄 아는 풍원이가 대견하기만 했다.

풍원이는 이튿날부터 곧바로 전에서 일을 시작했다. 전에서 하는 일은 물산 창고에서 하는 일과는 또 다른 일이었다. 물산 창고에서는 물품들만 정리하면 되었지만 전에서는 사람들을 상대해야만 했다.

물산 창고에 있는 물품들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전에 있는 물품들은 살아 움직였다. 물산 창고에서는 물품 성질이 한 가지였지만 전에서는 어떤 손님이 찾느냐에 따라 물품 성격이 변화무쌍하게 달라졌다.

“전에서는 물건도 팔지만 마음을 팔아야한다. 손님들 마음을 잘 읽어야 한다는 말이다.”

“마음을 어떻게 읽나요?”

“빠곰이 장사꾼은 물건을 팔지만 앞을 내다보는 장사꾼은 손님들에게 마음을 판다.”

“어떻게 마음을 파나요?”

어떻게 마음을 읽고 판다는 말인가. 장사가 마음을 읽고 마음을 판다는 소리는 금시초문이었다. 풍원이는 우갑 노인의 말을 얼른 이해할 수 없어 묻고 또 물었다.

“손님에게 믿음을 주고 신뢰를 주는 것이지! 이제부터 내가 어떻게 손님을 대하는지 눈여겨보도록 해라!”

우갑 노인이 풍원이에게 말을 마치고, 때마침 몸종을 거느리고 전을 들어서는 노 마님을 향해 다가갔다. 늙은 마님은 입성에서나 걸음걸이에서나 귀티가 풍겼다.

“어느 댁에서 납신 마님이신지요?”

“청금동 문경공 댁 마님이우.”

우갑 노인의 물음에 노 마님을 따라온 몸종이 대답했다.

“문경공 댁이라면 영의정 댁 아니리까?”

“그렇다우.”

지금은 조락했지만, 문경공이라면 한 때 영의정까지 지낸 사대부 집안이었다. 조락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한참 위세를 떨쳤던 그 때를 견주어 하는 말이고 지금도 물려받은 수많은 농토를 가지고 소작인들을 부리며 떵떵거리는 집안이었다.

“귀한 댁 노 마님께서 전까지 어인 거동을 하셨는지요?”

“이보게, 소반이나 보여주게!”

노 마님이 몸종을 보며 말했다.

“소반은 저쪽에 있습니다. 마님, 저리로 거동을 하시지요.”

우갑 노인이 소반이 쌓여있는 전의 안쪽으로 노 마님과 몸종을 이끌었다.

소반전에는 통영반, 나주반, 해주반, 안주반, 호족반, 구족반, 책상반, 팔모반, 원반, 반달상, 귀상, 번상, 전골상, 열두모판, 여섯모판, 연잎판, 단각반, 개다리소반, 호족반, 죽절반, 외다리소반, 식반, 주안반, 번상, 제상, 교자상, 대궐반, 독좌상, 고각반, 엄족반이 종류별로 진열되어 있었다.

“용도가 무엇이온지?”

우갑 노인이 돌상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우리 도련님이 첫돌이우.”

노 마님이 거동한 이유를 몸종이 말했다.

여염집에서는 돌이라 하여 상을 따로 장만하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웬만한 집안에서도 쓰던 소반에 수수떡이나 실타래나 붓 같은 돌잡이 물건 서너 개를 올려놓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것도 끼니 걱정을 면한 집일 경우였다. 거개의 집들에서는 돌이 되었는지도 모르고 지나갈 정도로 사는 게 팍팍했다. 그러나 아무리 위세가 꺾였다하나 영의정을 지낸 집안의 손자 돌잔치였다. 그러니 남들 눈을 봐서라도 돌상은 번듯하고 푸짐하게 차려야했다. 그렇게 집안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푸짐하게 음식을 장만해야만 아랫사람들도 하루쯤 배불리 먹고 즐기며 그동안의 온갖 묵은 감정들을 날려 보내기도 했다.

아랫것들을 시켜도 될 일을 노 마님이 직접 나왔다는 것은 돌잔치에 필요한 다른 물건들도 장만할 것이 많다는 것이었다. 우갑 노인 입장에서는 상 하나를 파는 것이 대수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돌상으로는 팔모반이 많이 쓰이는데, 팔모반도 여러 종이라.”

우갑 노인이 노 마님의 표정을 보았다. 늙은 마님은 팔모반을 보면서도 진열된 다른 상들을 번갈아보며 살폈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