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청주민예총 사무국장

벚꽃 지고 이팝나무 꽃이 피었다. 어느덧 여름의 문턱에 들어서고 있다. 5월, 신록이 짙어지는 계절이다. 나는 지금 어느 계절에 와 있는지, 계절에 맞는 옷을 입고 있는지 궁금하다.

내가 몸담은 청주민예총은 18일부터 청주민족예술제를 연다. 해마다 주제를 달리해오고 있는 청주민족예술제의 2017년 주제는 ‘물어 본다’이다. ‘나의 삶에 대하여’, ‘나의 예술에 대하여’, ‘민예총 예술가에 대하여’ 나의 예술은 어디쯤 와 있을까, 나의 예술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청주민예총 회원으로서 나의 예술은 무엇인가 등에 대한 물음일 것이다.

나의 시작(詩作)이 예술에 속하는지 알 수 없으나 그 여부를 떠나 이 기회에 나를 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다.

아무것도 모르고 문예반에 들어서던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렸다. 몽상과 추상의 언어의 마력은 고등학교 시절의 모든 것이었다. 진작 글쓰기에 재능이 없음을 알았음에도 막걸리 한 잔에 젓가락 장단을 치며 민중가요를 부르던 선배들의 모습에 매료되어 시 쓰기를 포기하지 못했다. 첫 번째 실수였다.

나에게 시 쓰기는 형식보단 내용이 중요했다. 어떻게 쓸 것인가 보다는 무엇을 쓸 것인가에 몰두했다. 그리하여 김지하, 김남주의 시를 좋아했다. 그러나 나의 대학시절은 너무 평범했다. 너무 조용했고 너무 나약했고 너무 게을렀다. ‘실천하라, 실천하라 실천만이 진보이니’를 외쳤던 선동적 문구를 뒤로하고 자격증 준비를 하고 이별을 하고 그렇게 이십 대는 흘러갔다. 실천 없는 사회부적응자가 다시 시를 쓰고 어쩌다 시인이란 칭호를 얻고 어쩌다 시집 한 권을 냈다. 두 번째 실수였다.

자본주의의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자식을 키우고 살아가는 30대가 넘어서야 내용만큼 형식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무능한 가장이자 무명시인의 삶 속에서 시적 감수성이 자리할 자리가 너무 좁다. 나의 재능 없음과 게으름에 대한 변명이겠지만, 순간순간 먹고 사는 일이 벅차다. 철없는 남편이자 무능한 아버지에 익숙해진 나는 내용도 형식도 잊은 지 오래다. 그런데도 나는 무엇 때문에 시를 쓰고 있는 것일까.

나는 또 어쩌다  ‘예술의 진보와 실천을 통하여 지역문화예술의 발전에 헌신함을 목적’으로 하는 청주민예총 회원이 되었다. 세 번째 실수다. 사람마다 예술의 정의가 다르고 예술의 기능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 나는 예술이 현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거울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예술은, 예술가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러나 예술은 예술로서 가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단순한 정치적, 선동적 율동이나 구호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어떤 이는 민예총을 민노총과 혼동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민예총엔 빨간 딱지가 붙어 버렸다.

이젠 내용도 형식도 중요한 것 같지 않다. 이 모두를 훨훨 놓아주고 훌쩍 떠나고 싶기도 하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기도 하고 계절에 뒤쳐져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자본주의에 익숙해졌음에도 그만큼 무능한 사람이 되었다. 5월은 그렇게 찾아왔지만, 아직 나는 여름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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