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철 수필가

“무장! 대왕님이 저렇게 물러나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하는 수 없지. 대왕 자신이 저지른 업보인 것을 어찌하겠어요?”

“그래도 그렇지요. 우리가 모시던 주군인데 너무 비참하잖아요?”

제왕 자리를 내려놓고 궁전을 떠나기로 한 염소 대왕을 위해 호위무사 수컷 진도가 좌중을 살피며 물었지만, 서쪽 하늘로 기우는 해를 따라나설 뜻을 밝힌 동물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염소 대왕의 호위 무장 사자는 잘 보필해주면 작은 고을 하나 정도는 내줄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지금껏 충성을 다했는데 물거품이 되어버렸으니 오죽 속이 상하랴.

선거를 앞두고 독수리는 자신이 제왕이 되면 동료들을 사냥하는 저 북쪽의 망나니 이리떼들과도 대화하겠다는 어마어마한 공약을 내세웠다. 그리고 아직 먹이를 제대로 구하지 못해 굶주리는 어린 들개나 오소리 족제비 같은 동물들에게는 매월 들쥐 다섯 마리씩을 주겠다는 공약도 내세웠다.

반면 염소는 자신이 제왕이 되면 세상 사람들이 동물의 세계에는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겠으며, 더구나 북쪽 사냥꾼 이리떼들과는 어떠한 타협이나 양보도 하지 않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또한, 기력이 쇠약해 먹이를 구할 능력이 없는 늙은 동물들에게는 매월 일정량의 먹이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열대 지방에 사는 코끼리나 물소 같은 짐승이 살아가는 방법도 연구하고 배워서 굶주리지 않고 잘 사는 동물의 세계를 건설하겠다는 공약도 내세웠다.

동물의 제왕이 되기는 하늘의 별 따기 만큼이나 어렵고 힘들었다. 날개를 가진 짐승은 날짐승이 제왕이 되어야 한다고 똘똘 뭉치는가 하면, 호랑이와 곰을 주축으로 한 길짐승은 저지난번에도 날짐승이 제왕을 했으니 이번에는 길짐승이 해야 한다며 기를 쓰고 염소를 도왔다.

염소와 독수리!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그들의 경쟁은 치열했다. 서로 밀고 밀리는 가운데 얄팍한 임기응변으로 한때 앞서 나가던 독수리의 기세가 주춤거리자 그 틈을 비집고 염소의 인기가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세상에 버림받은 줄 알고 살아가던 자신들에게 평생 먹고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는 데 감명을 받은 늙은 사자, 호랑이 등이 독수리에게서 등을 돌리고 염소에게 붙었기 때문이다.

결국, 염소가 승리해 제왕이 되었지만, 포악하고 사나운 동물을 다스린다는 것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남쪽 지방에 모여 사는 길짐승들은 자신의 구역에 먹이를 많이 주지 않는다고 늘 불평불만을 하는가 하면 같은 남쪽 지방에 사는 날짐승들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물체가 무서워 바깥나들이를 하지 못하겠다고 아우성이었다.

반면 북쪽 지방에 자리 잡은 사냥꾼 이리떼는 호시탐탐 남쪽 지방에 사는 동물 괴롭힐 생각에 몰두하고 있으니 착하고 정직하기만 한 염소 대왕의 근심·걱정은 떠날 날이 없었다. 더구나 자신을 믿고 따르던 사자도 등 따습고 배부르자 일손을 놓고 어떻게 하면 한밑천 잡을까 하는 궁리에 몰두하고 있는 듯해 속이 상했다.

염소 대왕에게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절친한 친구 여우가 있었는데 염소가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 정신적으로 도와준 고마운 친구이자 사회생활 교습 선생 역할도 병행해왔다. 염소 부모가 이리떼의 공격에 비명횡사하고 시름에 빠져있을 때 그의 곁을 지킨 것은 정말 여우였지만 그의 말대로 남을 위해 봉사할 만큼의 아량을 갖고 있지는 못했다.

염소의 곳간에는 뭇짐승들은 구하지 못하는 지렁이 갈비, 악어 눈물 등 없는 게 없을 정도였다. 여우는 감언이설로 염소를 달래고 어르면서 염소 부모가 모아 둔 곳간의 금은보화를 몰래 자신의 집으로 물어 날랐다. 염소는 자신이 제왕의 자리에 오른 것이 여우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라 생각해서 그 이후로는 모든 일을 여우와 의논하기에 이르렀다.

제왕이 되어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동물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으며 그들은 먹이 조달을 어떤 식으로 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열대 지방으로 여행을 떠날 때의 일이다. 기후도 다르고 동물들의 몸집이나 생김도 다르기에 준비할 사항이 많았다. 물론 그 준비 작업은 호위 무장 사자가 해야 하나 염소 대왕은 여우의 말을 더 귀담아들었다.

염소 대왕은 여우가 옆에 있어야 안심이 될 것 같아 부하들 몰래 여우를 짐칸에 태우고 아프리카 열대지방 순방에 나섰다. 혼자 결정하기 어려운 일은 여우가 숨어있는 짐칸으로 들어가 의견을 듣고 시키는 대로 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여우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그 누구도 여우의 말을 거역하지 못했다. 자신이 불리하면 염소 대왕이 시켜서 하는 일이니 군소리 말고 하라고 하면 호위 무장 사자까지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우아한 모습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염소 대왕의 속셈을 미리 읽은 여우는 밖에서 털 고르기 전문가를 데려와 대령했다. 그뿐이 아니다. 염소 대왕의 기력이 떨어지고 볼품없이 줄어드는 살을 전과 같이 팽팽하게 유지하려고 그 방면에 이름 있는 기술자를 섭외해서 데리고 드나들었다. 원칙적으로 여우는 삼엄한 궁전의 관리들에게 검문을 받고 그 출입목적을 기록부에 적은 다음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언제나 무사통과였다.

결국, 사달이 나고 말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남쪽 지방의 길짐승들이 거칠게 여우의 만행을 항의해왔고 그 자존심 강하던 염소 대왕이 몇 번인가 고개를 숙이며 대 짐승 사과문을 낭독했지만, 성난 동물들은 염소 대왕의 퇴진과 여우의 처벌을 요구해왔다. 한번 불붙기 시작한 동물들의 성남은 가라앉을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염소 대왕은 자신의 무능함을 탓하며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너무 늦어있었다. 그래도 그는 여우를 원망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안녕과 영광을 위해서 최선을 다한 것으로 믿고 싶을 뿐이었다. 여우는 동물들이 제일 싫어하는 조그마한 새 둥지에 갇히는 신세가 되어 언제 풀려날지 기약 없는 생활이 시작되었지만, 뉘우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이제 염소 곁에는 아무도 없다. 위세를 떨치며 동물의 제왕에 오를 때에는 사자나 호랑이 늑대 등 모든 동물이 찾아와 넙죽 엎드리며 충성을 맹세하더니만 제왕의 자리를 내어놓고 궁전을 떠난다고 하니 모두 싸늘한 시선으로 돌변해버렸다.

“대왕이 잘못했다고는 하나 우리는 처음처럼 대왕을 받들어야 합니다. 나는 끝까지 대왕을 따르겠습니다.”

호위무사 수컷 진도가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하자 암컷 진순이도 ‘나도 따라가겠소.’ 하고 벌떡 일어났다.

염소 대왕은 진돗개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두 분의 우정 고맙지만, 혼자 가겠습니다. 나는 이제 들녘으로 돌아가 평생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쓸쓸히 동물궁전을 떠나는 염소 전 대왕의 좌우에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진돗개 두 마리가 따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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