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오늘부터 상전 안팎을 돌며 허드렛일부터 하거라!”

그 날부터 풍원이는 충주의 윤왕구 객주 상전에서 일을 시작했다. 풍원이가 윤 객주 상전에서 하는 일은 우갑 노인 말대로 허드렛일이었다. 윤 객주 상전에는 하루종일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 뿐 아니라 우마차도 수시로 오가며 짐을 싣거나 부렸다. 그럴 때마다 풍원이는 창고로 짐을 옮기거나 창고에 있는 물건들을 마차에 실었다. 사람들과 우마차가 떠나고 나면 흐트러진 물건과 빈 가마니들을 정리하고, 바깥마당과 안마당에 떨어진 검불들을 쓸었다. 상전 곳곳에 있는 창고와 너른 마당만 쓸어도 하루해가 모자를 판이었다. 해가 지고 하루하루가 가는 것이 아깝기만 했지만, 곧 장사를 배울 수 있다는 희망에 묵묵하게 참아내며 열심히 일을 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두어 달이 지나가고 반년이 흘러갔는데도 우갑 노인은 풍원이에게 장사를 가르쳐줄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장사를 가르쳐주겠다며 데리고 왔던 윤 객주도 도통 볼 수가 없었다. 볼 수가 없는 것이 아니라 풍원이가 보고 싶다고 언제든 볼 수 있는 윤 객주가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쉽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풍원이는 상전에서 일을 하며 알았다. 상전에서 윤 객주는 하느님과 같은 존재였다. 상전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윤 객주를 하늘처럼 떠받들었다. 윤 객주를 따라왔던 첫날 우갑 노인이 단 한 마디도 거역하는 일없이 그저 따르던 것도 이해가 갔다. 은연중 풍원이도 점차 윤 객주가 저 높은 곳에 있는 그저 바라다만 보는 존재로 느껴졌다. 그러니 상전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는 막 머슴 주제에 찾아가 따진다는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풍원이는 후회막급 했다. 빨리 장사를 배워 돈을 벌어야 청풍 김 참봉 집에서 동첩으로 있는 보연이를 구해낼 텐데 구해내기는커녕 이렇게 비질만 하다 끝날 것 같은 조급감이 밀려들었다. 충주까지 와 남의 상전 허드렛일이나 할 것이었으면 차라리 청풍장에서 채마전이나 계속 할걸 하는 후회도 들었다. 어떤 날은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도망쳐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렇게 잡생각으로 정신이 혼란스러운 날은 일을 하고 싶은 마음도 일지 않았다. 마음도 몸도 천근만근이었다.

“이놈아! 비질하며 놀리는 손목만 봐도 성심을 다하는지 건성으로 하는지 보여! 창고는 어째 그리 엉망으로 정리를 해놓은 게여? 하나를 보면 열을 알고, 떡잎을 보면 싹수를 안다고 내 놈 하는 양을 보면 될 놈인가 아닌가를 알 수 있어!”

풍원이 마음을 알기나 하는 것인지 우갑 노인은 풍원이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잔소리를 퍼부었다. 그럴 때마다 풍원이의 가슴 속에서는 불같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우갑 노인의 기세에 눌려 불만스런 기미조차 보이지 못했다.

“장사는 언제쯤이나…….”

“허드렛일도 못하는 놈에게 무슨 놈의 장사를 가르쳐! 너 하기에 달렸다!”

견디다 더는 참기 힘들어 물어보면, 우갑 노인은 막연한 대답뿐이었다.

“그래도 대충이라도 알려주시면?”

“아직도 멀었다!”

언제쯤이면 장사를 배울 수 있을는지 알면 덜은 막막하지 않을 것 같아 용기를 내면,  우갑 노인은 단칼에 풍원이 입을 틀어막았다.

풍원이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이 또다시 주저앉아 상전의 허드렛일을 할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러자니 속에서는 부글부글 천불이 났다. 처음부터 윤 객주도 자신에게 장사를 가르쳐줄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우갑 노인도 자신을 붙잡아놓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일이나 부려먹으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생겼다. 의문은 의문에 의문을 낳고 아무것도 믿을 수 없었다. 하루에도 수백 번씩 갈까 말까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켰다. 꿈속에서도 윤 객주와 우갑 노인을 땅바닥에 패대기를 치고 상전을 떠나는 꿈을 꿨다. 그러나 깨고 나면 꿈이었다. 허망했다. 날은 자꾸 흘러갔다. 그렇게 허드렛일만 하다 한 해가 지나갔다.

“오늘부터는 전에서 일을 해라!”

우갑 노인이 풍원이에게 전에서 장사를 하라고 허락했다.

“어르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풍원이는 어쩔 줄 몰라 했다.

풍원이는 이렇게 기쁜 날은 없었던 것만 같았다. 집안이 몰락하고, 고향 도화리를 도망치듯 떠나 마골산 수리골 움막에서의 짐승만도 못했던 생활, 할머니는 늑대에게 어머니는 연풍관아에서 돌아가시고, 하나밖에 남아있지 않는 누이동생 보연이 마저 저승길이 코앞인 늙다리 김 참봉에게 동첩으로 빼앗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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