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시인 충북예술고 교사

일제 강점기는 뭐라고 해야 할지 참 난감한 시대입니다. 그 전에는 없었던 일들이 마구 일어났기 때문에 거기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능력이 그 어떤 때보다도 자유롭고 뛰어나게 발휘됐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새로운 문물과 제도가 도입되면서 거기에 맞는 일들을 해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거기에 맞춰 나타난 업적들을 보면 마치 미리 그런 준비를 하기라도 했다는 듯이 뛰어난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대부분 지금 보면 굉장히 어린 나이에 이룹니다. 문학사에서도 이것은 똑같이 나타납니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첫번째 문학사입니다. 내용이 좋다기보다는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 소개하는 것입니다. 이 책의 출판 연도를 보면 대정 11년인데, 서기로 환산하면 1922년입니다. 3·1운동이 1919년에 일어났는데, 불과 3년만에 문학사 책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내용도 3·1운동 이후의 새로운 문학 분위기를 언급하는 데서 책의 내용이 끝납니다.

문학사를 쓸 때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먼저 시대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 하는 점과, 어떤 글들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 점에서 전례가 없이 혼자서 작업을 해야 한다면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요. 그런 점에서 첫번째 작업을 하는 사람의 고충은 그 뒤를 따르는 사람에 비해 훨씬 더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후의 문학사 서술은 이 책의 성과와 한계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안자산은 우리 문학사를 상고시대(단군부터 삼국시대까지), 중고시대(삼국시대부터 신라시대까지), 근고시대(고려시대), 근세시대(이조시대), 현대(갑오경장부터 현재까지)로 크게 5마디로 구분했습니다. 문학 자체의 변화 발전에 초점을 두었다기보다는 우리가 흔히 아는 일반 역사의 전개과정에 의지했음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후대 문학 연구가들의 비판을 받습니다만, 그거 첫 걸음을 뗀 것이기에 후대 학자들이 안 볼 수 없는 그런 자취가 됐습니다.

제가 대학 때 서지학을 하는 교수님 방에 갔다가 이 책을 보고서는, 빌려달라고 해서 복사집에서 복사했습니다. 복사가 밀려서 너무 늦었는데, 교수님 연구실로 가다 보니 마침 교수님이 퇴근하느라고 교문을 나서고 계시더군요. 저를 보더니 화를 내며 책을 달라고 하시더군요. 마치 잃었던 물건을 찾은 아이처럼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보고 속으로 뜻밖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에겐 평범한 책이었는데, 이 희귀본의 주인에게는 천금을 주고도 못 살 것이었겠지요. 이렇게 놀란 교수님이 저 이후에 찾아오는 학생에게 빌려주었을까요? 그것도 궁금해지네요. 아마도 안 빌려주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빌려달라는 당돌한 요구를 하는 학생이 없었을지도 모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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