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희 수필가

청소기가 고장 났다. 먼지를 빨아들이는 것이 시원찮고 호스가 뚫어졌다. 아쉬운 대로 테이프를 감아 썼는데 소리만 요란하지 한번 돌리고 돌아서면 군데군데 머리카락이 그냥 남아 있다. 10여 년을 부려 먹었으니 왜 아니겠는가. 큰맘 먹고 먼지봉투를 사지 않아도 되어 경제적이라는 ‘먼지 따로’ 청소기를 새로 샀다.

남편이 청소기 조립하는 것을 보니 여러 가지 부품이 많았다. 늘 기본적인 흡입구 한 개로 사용했던 내가 딸려온 부품을 보고 복잡하다고 하니 남편은 사용설명서를 잘 읽어보라고 했다. 그런데 들여다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전자제품을 사면 사용설명서가 따라온다. 부품의 이름과 조립방법, 제품이 지닌 성질, 작동법 등이 적혀 있다. 좁은 구석을 청소할 때는 가늘고 뾰족하게 생긴 흡입구를 사용하고, 침대 밑처럼 낮은 곳을 돌릴 때는 얇은 타원형의 흡입구로 갈아 끼우라고 한다. 이유 없이 작동이 안 될 때나 자주 일어나는 부작용에 대한 답변도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제품을 사용하기 전에 설명서를 읽고 그대로 사용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생각해보니 나도 설명서를 꼼꼼히 읽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냉장고나 세탁기를 샀을 때도 설치해주는 직원이 알려주는 기본적인 사용법과 주의사항 정도만 읽어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작동이 안 되면 우선 A/S 센터에 전화부터 걸었다.

사용설명서는 물건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사람과의 만남에서도 서로에 대해 아는 일이 중요하다. 사회에서나 직장에서 상대의 성격을 알지 못하면 같이 어울리기 어렵고 서로 속을 모르면 친하게 지낼 수 없다. 평생을 함께하는 부부간에는 더욱 그렇다.

결혼 전에 남편과 1년 이상을 만났지만, 남편 성향을 잘 알지 못한 채 결혼했다.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맑고 순수한 사람이라는 것만 믿었다. 그래도 결혼하고 몇 개월은 소꿉장난하듯 달콤한 시간을 보냈는데 어느 날 시댁 일로 남편하고 다투게 되었다. 남편은 자기주장만 하고 내 말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내가 시댁보다 친정을 편애한다는 것이었다.

조용히 내 생각을 이야기했지만, 한 번 어긋나기 시작한 대화에서 남편의 목소리는 점점 더 높아졌다. 그대로 계속 대화하다가는 큰 싸움이 날 것 같아 내가 먼저 대화를 접었다. 그랬더니 남편은 자기를 무시한다며 화분 하나를 거실에 던졌다. 군자란이 핀 화분이 깨지며 바닥에 흙이 쏟아져 난장판이 되었다. 그를 알고 나서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지만 두려웠다. 가끔 먼저 결혼한 선배들한테 살림 치는 남자가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내 눈앞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니 당황스러웠다. 남편한테 그런 면이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 배신감마저 들었다. 이성을 차린 남편은 바로 사과했지만, 그날의 후유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큰소리 낼 일이 아니었는데 싸움은 꼭 사소한 일에서 일어났다. 이상하게 시댁 이야기만 나오면 남편이 예민하게 반응했는데 아마 차남인 남편이 부모님을 모셔야만 하는 부담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남편은 목소리가 크다. 아니, 목소리만 큰 것이 아니고 억양이 강하다. 주장을 내세울 때는 꼭 싸우려고 덤벼드는 사람 같아 심장이 두근거릴 때가 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내가 큰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몰아붙여 창피할 정도다.

그런데 남편은 자신의 그런 성격을 알지 못했다. 제발 소리 지르지 말고 조용하게 이야기하라고 하면 의견을 말하는 것뿐인데 왜 자기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가느냐며 오히려 화를 냈다. 그러다 보니 내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꼭 할 말이 아니면 입을 닫고 살았다. 그럴 때면 남편은 또, 트집을 잡았다. 답답하니 속 시원히 이야기 좀 하라고 했다.

나는 대화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하면 두 번 다신 말 하지 않는다. 상대가 억지를 부려도 속으로만 “그게 아닌데”라고 할 뿐이지 모집어 말하지 않는다. 처음엔 좀 억울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곧 진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남편과 같이 산 지 20년이 넘었다.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세월을 보내면서 나는 남편을 잘 다루는 사용설명서를 만들었다. 반복되는 실수로 더는 남편과 감정소모를 하고 싶지 않은 생각에서였다. 설명서엔, “부모님과 동생들에게 잘하고 친구가 많다. 부지런하고 성격이 꼼꼼하여 무엇이든 기록하고 자료를 모아둔다. 동물을 사랑하고 스포츠를 좋아한다. 정의롭고 도전정신이 강하다. 아내와 딸을 최고로 생각하는 팔불출이다.”라는 남편의 장점을 적었다.

반면에 “억지를 부리면 대꾸하지 말고 당신 말이 옳다며 무조건 맞장구를 쳐줘야 한다. 승부욕이 강하고 불의와 절대 타협하지 않는다. 식성이 까다롭다. 성격이 급하고 잔소리가 심하다. 한 번 마음 먹은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야 한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 돈을 빌려서라도 도와주는 넓은 오지랖 때문에 경제관념이 없다.”라는 단점에 대한 설명도 상세히 적혀 있다.

그렇게 남편의 성향을 세밀하게 분석하는 데 10년도 더 걸린 것 같다. 전자제품 같으면 사용설명서 한번 읽어보면 다 알 수 있을 텐데 사람의 속을 아는 일은 참 어려웠다. 부부가 신혼 때 많이 싸운다고 하더니, 나도 새댁 시절을 아옹다옹하면서 남편을 알아가느라 다 보낸 셈이다.

하긴 55년을 같이 산 친정 부모님도 그랬던 것 같다. 검은 머리가 허옇게 바래도록 같이 살았는데 그래도 이해 못 할 부분이 있나 보다. 서로 잘했다며 목소리를 높일 때는 다시는 안 볼 것처럼 냉랭한데,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손잡고 다니셨던 걸 보면 부부는 하늘에서 내린 인연이 틀림없는 것 같다.

괄괄하여 생전 늙을 것 같지 않던 남편도 나이가 드나 보다. 몇 년 전보다 흰머리가 부쩍 많아진 남편을 보면 안쓰럽다. 남자는 나이 들면 기가 죽는다더니 남편도 이젠 예전 같지 않고 잔소리도 많이 줄었다. 목소리가 작아지고 웬만한 일은 웃어넘긴다. 오히려 조용하고 차분했던 내 목소리는 갈수록 커지니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물건이 손에 익어 편하게 사용하는 것처럼 남편한테도 그런 마음이다. 서랍을 열고 청소기 사용설명서를 꺼내 내가 만든 남편의 설명서와 비교해본다. 읽어가다 보니 ‘주의사항’이라고 적힌 부분에서 시선이 멈춘다. “지시사항을 지키지 않았을 때 사용자의 부상이나 재산 피해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뜨끔하여 남편의 설명서에도 주의사항이 있었던가 하고 생각해보니 이젠 익숙해져 주의할 점이 없는 것이 주의사항으로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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