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보영 수필가

가슴이 뭉클하다. 혹한의 추위를 녹이고도 남을 만큼 가슴 한 자락이 따뜻해져온다. 그녀가 전해준 온기 때문이다.

며칠 전 한통의 전화가 왔다. 낮선 중년 여인의 목소리다. 남편의 제자라고 한다. 여인의 말인즉 ‘학교를 졸업하면서 선생님에게 진 사랑의 빚이 있는데 그 빚을 갚고 싶다’며 그 일로 인하여 항상 마음이 무거웠고 이제는 마음의 짐도 내려놓고 싶고 졸업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신 선생님에게 그 때의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서 일간 찾아뵈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남편을 통해 들은 이야기는 이렇다. 50여 년 전에 초등학교에 잠시 근무 했을 때 있었던 일이란다. 기억에도 없는 일인데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겨우 더듬어 낸 아주 작은 일이라고 했다. 그 무렵엔 초등학교 무상교육이 실시되지 않았던 때였는데 한 학생이 학교에 내야 할 공납금이 밀려 있어 학교에 나오지 않아 졸업을 하지 못할 처지에 있는 것이 안타까워 공납금을 내 주고 졸업을 할 수 있게 해 준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녀의 말을 빌리면 그 액수가 187원이었다는 것이다.

며칠 후 187원이 106배가 되어 돌아왔다. 여기에 그녀의 아름다운 마음의 무게를 더한다면 숫자로는 환산 할 수 없는 가치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초등학교 졸업장도 받지 못했을 것이고 이런저런 과정을 거친 뒤 상급학교에 진학하려 했을 때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해 진학이 불가능 했을 것’이라며 그 고마움을 한시도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선생님의 사랑에 조금이나마 보은하고 싶어서이니 받아 달라는 그녀의 간절한 마음을 어쩌지 못해 남편은 차마 거절 할 수 없었다.

코흘리개였던 앳된 소녀가 육십 줄에 들어선 여인이 되어 노스승을 찾아와 회포를 푸는 모습은 눈물겹도록 아름다웠다. 또한 어린 제자가 중년의 여인이 될 때까지의 긴 시간 동안 그의 마음속에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는 그녀의 스승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평생 동안 교직에 몸담아오면서 때로는 버겁고 힘들었던 기억들이 보람으로 승화되는 아름다운 순간이었으리라.

187원의 의미를 유추해본다. 이는 사랑이고 관심이 아닌가 싶다. 한 젊은 교사가 교육자로서 첫 발을 내딛게 된 초임지에서 스승과 제자로 만나 제자의 마음 밭에 사랑이라고 하는 작은 씨앗 하나를 심었더니 튼실하게 자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랑과 관심이 부족해 그녀의 아픔에 동참하지 못하고 무심히 지나쳤더라면 지금의 귀한 열매를 거둘 수 없었을 게다. 한생을 살아가는 동안 때를 따라 주어지는 삶의 텃밭에 무엇을 심느냐에 따라서 거둘 수 있는 열매는 사뭇 다른 것일 수 있다는 사실 앞에 사뭇 숙연해진다. ‘심은 대로 거둔다.’고 하는 옛 말의 의미가 바로 이런 것은 아닌지 모른다.

그녀는 어떤 성품을 지녔을까. 잊어버려도 좋을, 그것도 어린 시절에 있었던 작은 일을 50여년이라고 하는 긴 세월 동안 잊지 않고 아주 귀한 것으로 여겨 가슴에 품을 수 있는 인품의 소유자라면 뒤도 돌아보고 옆도 살필 줄 아는 훈훈한 삶을 살고 있으리라 믿어도 좋을 것 같다. 하여 그가 걸어온 삶의 길목에는 튼실하고 아름다운 열매들로 가득하지 않을까. 그런 그에게 아름다운 사람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으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매스컴을 통해 연일 보도 되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들이 간담을 서늘하게 해 차마 볼 수 없어 채널을 돌리고 말 때가 종종 있다. 제자가 스승을 폭행 하는가 하면, 어떤 스승들은 해서는 안 되는 인면수심의 일들을 저지르는 바람에 동료 선생님들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게 하기도 한다. 이 시대에는 진정한 스승도 없고 제자도 없다며 개탄하는 소리가 가슴을 아리게 한다. 교권이 땅에 떨어졌다고 한탄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은 백 년 대계를 꿈꾸며 행해야 하는 일이거늘 오늘의 현실이 어렵다고 가르치는 일과 배우는 일을 포기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농부는 알곡이 아닌 가라지가 날 것이 두려워 씨앗을 뿌리는 일을 포기 하지 않는다. 때로는 알곡보다 쭉정이가 많을지라도 뿌리고 가꾸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 적어도 진정한 스승이라면 갈 길을 바로 알지 못해 방황하는 아이들이라 할지라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들을 알곡으로 다시 빚어지게 하기 위해 기꺼이 혼신을 불사를 수 있을 만큼의 정열과 인내심을 가지고 고통을 감내하며 진물 같은 땀을 흘려야 하리라.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없다”고 하지 않던가. 아무리 척박한 땅이라도 갈고 거름 주어 씨앗을 뿌리다보면 언젠가는 열매를 맺어 아름다운 소산을 거둘 수 있음은 진리다. 절망과 불신의 씨앗을 뿌리면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소망을 가지고 꿈의 씨앗을 뿌리면 튼실한 열매를 거둘 수 있음이다.

수 십 여 년 전의 작은 일을 잊지 않고 옛 스승을 찾아 온, 가히 국보급이라고 찬사를 해도 과하지 않을 이런 제자도 있기에 세상의 모든 선생님들에게 교사의 직분을 택하길 잘 하셨다고, 이를 천직으로 알고 가르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여도 좋으리라 권면하고 싶다.

그 날은 산마루에 걸려 있는 붉은 해가 더 할 수 없이 아름다워 보이는 하루였다.

남편은 제자의 아름다운 마음이 담긴 그것을 헛되게 쓸 수 없다며 꼭 필요로 하는 곳에 전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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