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장마당에 채소와 양념을 취급하는 가가나 전포가 없으니 주막집 주인들은 필요한 채소와 양념을 수급하려면 장날 장터로 나가거나 직접 농가를 방문하여 살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한가한 날은 괜찮았지만 바쁜 날은 보통 성가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손님들이 밀어닥쳐 바쁠 때는 부모가 쓰러져도 돌아볼 틈이 없는 것이 장사였다. 그럴 때면 파나 마늘 한 쪽 다듬는 손조차 아쉬웠다. 그럴 때마다 풍원이는 종종 푸성귀와 파, 마늘 등을 다듬어주곤 했었다. 그때마다 아주머니가 무척 기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장사라면 큰 밑천이 들지 않아 자신의 형편에도 맞고, 그것을 손질해서 주막집에 대주면 장사가 될 것 같았다. 청풍에는 강을 타고 사방에서 오는 뱃꾼들과 보부상들, 그리고 장돌뱅이들이 끊이지 않아 주막집들이 즐비했다. 또 관아가 있어 일 년 내내 관리들이 오가니 이들이 묵을 유곽이 많았다.

청풍장에서 가장 큰 곡물전을 하는 사람은 홍판식이었다. 홍판식은 평생 장마당에서 잔뼈가 굵어온 사람이었지만 글줄이나 읽은 서생처럼 어딘가 모르게 점잖은 풍모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아저씨, 곡물전 옆에 손바닥만큼만 빌려주세요.”

풍원이가 홍판식을 찾아가 말했다.

“무어?”

느닷없이 나타나 남의 전을 빌려달라니 홍판식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장사를 좀 해보려고 합니다.”

“그럼 하면 되지, 왜 남의 전은 빌려달라고 하느냐.”

“제가 당장은 큰 전을 빌릴 돈이 없어 그럽니다.”

“돈도 없이 무슨 장사를 한단 말이냐?”

홍판식은 기가 찼다.

“세는 드릴게요.”

“안 된다!”

홍판식이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그날부터 풍원이는 홍판식의 눈에 들기 위해 곡물전을 드나들며 일을 거들었다. 처음에는 홍판식도 생면부지의 풍원이가 곡물전을 드나들며 자신을 도와주는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며칠 하다 제풀에 꺾여 그만두겠지 하는 생각에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매일처럼 나타나 한결같이 자신의 일을 거들었다. 두고 볼수록 풍원이가 하는 짓이 눈에 들었다.

“그래 무슨 장사를 하려고 그러느냐?”

서너 달이 지난 어느 날 홍판식이 풍원이에게 물었다.

“빌려주시려구요?”

“그래, 한 번 해보거라!”

“고맙습니다! 싸전도 계속 도와드릴게요!”

풍원이는 곧바로 홍판식의 곡물전 옆 귀퉁이를 얻어 더부살이로 채소전을 열었다.

“밭에 나가면 맨 푸성귀고, 집집마다 자기들 먹을 양념들을 농사 짓는데 그게 장사가 되겄냐?”

곡물전 홍판식은 풍원이가 하는 장사가 시답잖아 보였는지 들고날 때마다 한마디씩 했다. 평생 장사를 해온 홍판식도 전적으로 채소장사만 하는 것은 이제껏 본 일이 없었다. 더구나 사내 녀석이 쭈그리고 앉아 푸성귀와 양념거리를 다듬는 모습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채소 장사는 시골 아낙들이 장날이 되면 광주리에 이고나와 푼돈이나 가용에 보태려고 하는 일이었다.

“아이구, 사내놈이 뭐 할 짓이 없어…….”

“그걸 귀찮게 뭣 하러 까고 있디야?”

“잔손 일구지 말고 그냥 갖다 줘!”

“이 녀석아! 부랄 떨어진다!”

홍판식 뿐만이 아니었다. 풍원이가 푸성귀를 다듬고, 파나 마늘을 풀어놓고 껍질을 까고 있는 모양새를 신기하게 구경하다가도 사내 녀석 하는 꼴이 눈에 거슬렸던지 지나는 장사꾼마다 모두들 핀잔을 늘어놓았다.

“이렇게 까서 팔면 먹는 사람들은 편하고, 저는 값을 더 받으니 꿩 먹고 알 먹고 아닌가요?”

풍원이가 아랑곳하지 않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네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값은 더 받을지 모르지만 까게 되면 파치가 많이 나오니 외려 손해 아니겠느냐? 접 째 그냥 팔면 좋은 놈이나 나쁜 놈이나 함께 묻어 넘어가니 양도 풍성해 보이고 품도 들지 않으니 그게 일석이조 아니겠느냐?”

장사꾼들은 풍원이 하는 짓이 답답했다.

“장사라고 속이면 되나요? 손님들이 내 물건을 팔아줘서 그 덕에 내가 밥을 먹는 데 저도 성심을 다 해야지요.”

“누가 그걸 알아주냐? 팔어먹으면 그걸로 끝나는 거지.”

“장사 새로 배우거라!”

장사꾼들은 풍원이의 상술을 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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