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수필가

학성산성이 장곡산성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 같은 포곡식산성인데 장곡산성은 동쪽으로 주둔지가 있으면서 서쪽을 방어하도록 되어 있고, 이 성은 북쪽 천태 저수지 쪽으로 주둔지로 삼을만한 골짜기가 있고 동, 서, 남쪽에서 달려드는 적을 방어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광시면 소재지에서 천태로 가는 도로를 감시하는 역할도 했을 것이다. 상황과 지형을 적절히 이용한 흔적이 보인다.

동쪽으로 구릉을 지나 산줄기를 다시 오르면 학성산성의 보조성이라고 할 수 있는 태봉산성이 있다. 태봉산성을 거쳐 소구니산성을 지나면 머지않은 곳에 예산의 임존성에 연결된다. 그래서 장곡산성과 학성산성은 적의 침범에 따라 상호 보완적인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인의 전략적 슬기가 엿보인다. 장곡산성 비해 이 성이 훨씬 견고하고 웅장한 것으로 보아 그 중요성도 짐작할 수 있다.

학성산성처럼 규모가 큰 석성을 보면서 그 웅장함이나 문화재적 가치보다 먼저 생각나는 것은 당시 백성들의 고충이다. 배고프고 기운 없고 권력도 배경도 없는 힘없는 백성들이 가족을 이별하고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이곳까지 끌려와서 정과 망치에 맞으며 돌을 다듬고 등짐으로 나르고 쌓으면서 돌에 맞고 돌에 치고 돌에 피를 바르면서 피눈물 나게 가족을 그리워했을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다. 아무런 이념도 없는 삼국 전쟁, 통치자의 권력 야욕 때문에 힘겹게 살았던 소시민의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이곳에 의미 없이 묻어야 했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오늘날에는 그런 무모한 정치가 없을지 생각해 볼 일이다.

홍성군에서는 이 학성산성도 장곡산성과 아울러 옛 주류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근거로 조선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임존성이 대흥에서 13리 떨어져 있다고 되어 있어 대흥현에 있는 임존성은 봉수산성이고 이곳 학성산성이 정작 임존성이니 이곳이 주류성이라는 것이다. 또한 주류성의 둘레가 200보(1천140m)라고 한 것은 학성산성이 1천156m이므로 이 성과 일치한다는 주장이다. 어떤 문헌에서는 ‘학성鶴城’이라는 한자를 ‘두류미성’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니 ‘주류성’과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정말 그럴 듯하다.

현재의 임존성은 백제부흥운동의 마지막 거점지인 학성산성을 점령하고 신라와 당이 이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봉수산에 새로 산성을 구축하고 임존성을 그곳으로 옮겨 갔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면 대련사에 있던 도침이 이곳 학성산성에서 부흥군을 일으켰고 임존성은 신라의 산성이라는 말이 된다. 앞뒤가 잘 맞지 않는 주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임존성은 봉수산 부근에 있지만 정작 산의 정상은 테메식 산성 바깥에 있는 것도 어색한 일이다.

임존성에서 소구니산성 태봉산성 장곡산성으로 이어지는 백제부흥군의 저항선이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지휘 본부가 있고  678년 3천여 백제 부흥군이 최후를 맞은 주류성이라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백제부흥운동의 시작과 끝의 거점은 아무래도 임존성이 맞는 것 같고, 3천 부흥군이 최후의 죽음을 맞은 곳은 임존성이 아니라면 연기 지역에 있는 운주산성이 맞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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