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는 사람들이 어떻게 물건을 팔고 사는지를 세세하게 살폈다. 장사는 보면 볼수록 배울 점이 무궁했다. 사람에 따라, 장소에 따라, 계절에 따라, 시간에 따라,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장사가 풍원이 눈에는 마술처럼 보였다. 그런 장터를 돌아다니다 풍원이는 이따금씩 물건을 팔아보기도 했다. 배에서 짐을 부리고 나면 파치가 생겨났다. 파치들은 상품 가치가 떨어져 제값을 받기도 어렵고, 버리기에는 아까운 계륵 같았다. 그런 파치들은 대부분 일하는 담꾼들의 품값에 얹어 덤으로 주거나 뱃꾼들이 들고나가 주막집에서 술로 바꿔먹었다. 그러나 술도 바꿔먹기 힘든 파치들은 배청소를 하며 강물로 던져버렸다. 풍원이는 그런 파치들을 모아두었다가 장터로 들고나가 땅바닥 장사를 했다. 

“이 녀석아! 신역만 고되지, 그 까짓 것 팔아 뭔 돈이 된다고…….”

“아저씨들 보기에는 잗달아보여도 제게는 보물이여요.”

“체신이 작다고 통까지 작으면 워디에 쓰겄냐?”

뱃꾼들은 풍원이에게 잗달다며 타박했다.

“작은걸 봐야 큰 것도 보이는 법이여.”

다른 뱃꾼들은 저마다 비웃었지만 도진태 선주만은 풍원이를 북돋아주었다.

“옛다! 이것도 한 번 팔아 보거라!”

때때로 도 선주는 풍원이 하는 짓이 마음에 들어 성한 물건을 내주기도 했다.

풍원이는 돈을 만드는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악착같이 일을 했다. 그래야만 한시라도 빨리 김 참봉네 소굴에서 보연이를 구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보연이를 생각하면 뼈가 녹듯 뱃일이 힘들어도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었다. 밤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잠자는 시간도 아까웠다.

그러던 풍원이가 뱃일을 그만두게 된 것은 배끌이를 하다 사고를 당한 후였다. 청풍 인근은 산악지역인 까닭에 강바닥의 경사면이 심해 물길 곳곳에 여울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눈이 녹아내리는 초봄이나 여름 장마철에는 강물이 불어나 배를 운행하는 데 지장이 없었지만 갈수기가 되면 수량이 줄어들어 배 바닥이 강바닥에 닿았다. 그러면 노를 저을 수 없고 사람들이 힘을 모아 배를 끌어올려야 했다. 더구나 청풍보다 상류에 위치한 영춘이나 영월로 올라가는 물길은 갈수기에는 아예 강바닥이 드러나는 곳도 많았다. 바닥이 드러나는 그런 곳에는 물골을 팠다. 대부분의 배들은 갈수기가 되기 전 장사할 물건들을 싣고 올라가지만 갑자기 물건이 달리거나 한꺼번에 많은 물건을 옮겨야 할 때는 뱃길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충주에서 청풍으로 가는 물길에는 배를 끌어올리기 위해 만들어놓은 물골이 곳곳에 있었다. 이런 여울의 물골은 좁고 경사가 심해 물살이 세차게 흘렀다.

그런 곳에는 배끌이들이 있었다. 어떤 곳은 마을 전체가 배끌이를 하는 곳도 있었다. 배들의 왕래가 빈번할 때는 온 마을 사람들이 배를 끌어올리기 위해 밧줄을 당기는 배끌이로 나섰다.

풍원이가 사고를 당한 곳은 재구미 마을에 있는 포탄여울이었다. 포탄여울은 뱃꾼들에게도 악명 높은 곳이였다. 재구미 마을에서는 ‘하루에 짚신 열 켤레를 신었다’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아무리 짚신이 부실해도 한 사람이 하루에 열 켤레를 신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재구미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배가 물골 입구에 다다르면 뱃꾼들이 배 위의 이물에서 강가에 있던 배끌이들에게 밧줄을 내려주었다. 배끌이들은 어깨나 허리에 줄을 매고 배를 끌며 여울을 거슬러 올라가야했다. 물밑에는 이끼가 잔뜩 끼어 미끄러운 바위나 날이 선 날카로운 칼바위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배끌이들이 배를 끌다 그런 곳에 걸려 넘어지거나 미끄러져 짚신이 벗겨져 떠내려가도 건질 수가 없었다. 짚신을 잡기 위해 밧줄을 놓아버리면 세찬 물살에 배가 떠내려가 좌초되기 때문이었다. 어깨가 빠질 듯 허리가 끊어질 듯 밧줄이 팽팽하게 당겨도 견뎌야 했다. 칼돌에 발바닥이 갈라져 피가 벌겋게 흘러도 줄을 잡고 당겨야 했다. 그런 판에 짚신을 줍고 자시고 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면 이물 덕판에 서 있던 뱃꾼들이 배 아래 물속에 있는 배끌이들에게 짚신을 던져 주었다. 그러니 하루에 짚신 열 켤레를 신었다는 말도 과장은 아니었다. 그 말 속에는 그만큼 강가에 사는 배끌이들의 고단한 삶이 들어있기도 했다.

풍원이가 사고를 당했던 날도 단월에서 건어물과 소금 스무 섬을 받아 싣고 물길을 거슬러 청풍으로 가고 있던 중이었다. 눈 녹은 물도 떨어지고 온 비도 적어 강물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지만 평생을 강에서 산 도 선주의 요량으로 그럭저럭 배는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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