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풍원이는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더 이상 늙은 김 참봉 밑에서 피지도 못하고 스러져 가는 보연이의 얼굴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건 차라니 죽음만도 못한 구차스럽고 더러운 하루하루였다. 한 울타리 안에서 매일 밤 벌어지는 늙은이와 보연이의 모습이 떠오르면 미칠 것만 같았다. 더욱 답답한 것은 보연이가 당하는 고문같은 생활을 알면서도 오빠로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자신의 무력함이 더욱 견딜 수 없었다. 당장 굶더라도 김 참봉 집을 떠나야겠다고 작정했다. 그리고 어서 빨리 돈을 모아 보연이를 데리고나와야겠다고 결심했다.

“보연아, 꼭 데리러 오마!”

김 참봉 집을 떠나던 날 풍원이는 보연이에게 굳은 약속을 했다.

“제 걱정일랑 조금도 마시고 오라버니 일에만 전념하세요.”

보연이가 풍원이를 안심시켰다.

풍원이는 어린 누이동생을 늙은 너구리 아가리에 남겨두고 나오는 심사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지만 돈을 벌어 반드시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을 하며 발길을 돌렸다. 보연이는 김 참봉 집을 떠나는 오라버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을 훔쳤다. 풍원이도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앞만 쳐다보며 발길을 재촉했다.

성 밖 나루터에서 뱃일을 하다

김 참봉 집을 떠난 풍원이는 그 길로 읍성 밖 나루터로 갔다. 가진 것 한 푼 없이 김 참봉 집을 떠난 풍원이는 나루에서 막일을 시작했다. 김 참봉은 풍원이 세경으로 매년 알곡 반섬을 주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그것은 김 참봉네 두 부자가 풍원이 남매를 자기 집에 잡아놓고 부려먹기 위한 술수였다. 밥만 먹여주고 재워만 줘도 감지덕지할 풍원이 남매에게 세경을 주겠다고 약속한 것도 다른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풍원이는 두 부자의 호의가 고마워 다른 머슴들의 미움을 받아가면서까지 뼈가 부서지도록 일을 했다. 그러나 세경을 주겠다고 선심을 쓴 것도 자기 집에 잡아놓고 일을 부려먹기 위해 던진 떡밥이요 술수였다. 그것은 다른 머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보게! 자네 세경은 내가 맡아두었다가 나중에 목돈으로 만들어 줌세.”

한해 추수가 끝나면 주는 것이 세경이었다. 머슴들은 그걸 바라고 힘이 들어도 일 년 내내 뼈 빠지게 일을 했다. 그러나 김 참봉은 말로만 세경을 주었다. 가을걷이를 마치고 세경을 줄 때가 되면 자기가 모아두었다가 불려 한꺼번에 준다는 말로 세경을 대신했다. 그러고는 막상 머슴이 나가려고 하면 갖은 트집을 잡아 세경을 반 토막 내거나 그것조차 뜸을 들이며 차일피일 미루다 주기 일쑤였다. 풍원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세경? 본래 삼 년을 채우지 않은 머슴은 세경도 없어! 더구나 넌 꼬맹이술까지 내며 잔치를 해줬으니 되려 게워내야 할걸!”

풍원이가 머슴살이를 끝내면서 목판장사 밑천이라도 삼기위해 그동안 일한 세경을 달라고 하자 김 참봉 아들 김주태는 적반하장 격이었다. 약속했던 세경은커녕 꼬맹이술을 내 잔치를 해줬으니 외려 그 값을 물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늙어빠져 뗏장 짊어질 날이 턱 밑에 온 김 참봉이 목숨이나 다름없는 보연이를 빼앗으며 준다고 했던 잘갑논 서 마지기는 애당초 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너무 억울하고 한스러워서였다. 그러나 세경은 당연히 주어야했지만 그것마저 꼬맹이술을 핑계 삼아 떼어먹었다. 속에서 치받히는 대로만 한다면 김 참봉 집에 불이라도 까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것도 생각뿐 어린 데다 천애고아로서 누구 한 사람 거들어줄 사람도 없는 풍원이로서는 억울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알몸으로 김 참봉 집을 나온 데다 나이 어린 풍원이가 할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우선 풍원이는 읍성나루터로 갔다. 청풍관아의 관문 격인 읍성나루는 큰 강줄기에서 벗어나있어 강 하류의 나루터들처럼 붐비지는 않았지만 남한강을 따라 올라온 배들이 끊이지 않고 오가는 곳이었다. 이런 배들은 주로 관아에 필요한 물산들이나 읍성 내 백성들이 필요로 하는 생필품들을 풀어놓았다. 그러다보니 큰 배들이 정박하는 다른 나루터에 비해 거래되는 물산의 규모는 대단치 않았으나 일 년 내내 장사가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풍원이는 이곳에서 담꾼으로 품을 팔아 장사 밑천도 마련해보고 장사일도 본격적으로 배워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장사를 할 종자돈은 나중 일이고 우선 당장 먹고 살려면 일거리가 급했다. 풍원이는 무작정 배들이 정박해있는 나루터로 갔다.

“넌 못해!”

몸은 땅땅했지만 아직은 앳된 티가 역력한 풍원이를 본 선주들은 저마다 손사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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