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 이대로 언제까지나 살 수는 없잖아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저도 안채에서 마님 구박이 심해 견딜 수가 없어요. 오라버니도 이렇게는 살 수 없잖아요. 오라버니가 독립할 때까지 만이라도 참아야지 어쩌겠어요. 제발 그렇게 하세요. 네?”

보연이가 애원했다.

“…….”

“제가 수발을 들면 땅도 떼어준대요.”

“그게 무슨 일인지 알고나 하는 소리냐?”

“예, 알아요.”

“보연아, 네 인생이 다 망가지는 거여!”

“오라버니만 괜찮다면 저는 정말 괜찮아요.”

“미안하구나. 오라비가 돼서 하나있는 동생도 지켜주지 못하고…….”

결국 풍원이는 보연이의 애원을 받아들였다. 달리 다른 방법이 없었다.

풍원이는 피눈물을 흘렸다. 아버지를 잃고 망덕봉 수리골로 숨어 들어가 짐승처럼 살 때 늑대 입에서 꺼낸 누이동생이었다. 그런 누이동생을 이제 와서 죽을 날을 받아놓은 것이나 다름없는 늙은이 회춘용으로 빼앗기게 되었으니 참으로 절통한 일이었다. 호랑이보다도 무서운 것이 양반이고 짐승만도 못한 것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부자들이었다. 풍원이와 보연이는 서로 마주보며 눈물만 철철 흘렸다. 아직 솜털도 가시지 않은 어린 것을 뗏장 짊어질 날이 멀지 않은 김 참봉에게 바쳐야 하니 풍원이는 억장이 무너졌다. 마음 같아서는 늙은 김 참봉의 상투라도 움켜쥐고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싶었지만 생각뿐이었다. 당장 두 남매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것이 김 참봉이었다.

“보연아, 다 내 탓이니 오라비를 원망하거라”

풍원이는 눈물만 뚝뚝 흘렸다.

“오라버니, 너무 속 끓이지 마세요. 다 제 팔자지요.”

오히려 보연이가 풍원이의 손을 잡고 위로를 했다. 풍원이는 어린 누이동생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이 너무나 무참했다. 그렇게 한참을 소리죽여 울기만 하던 풍원이가 시렁 위에 올려놓은 보퉁이를 내려 풀어 헤치더니 그 속에서 은가락지를 찾아 보연이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어머니가 남기신 가락지다. 네가 시집갈 때 주려고 했는데, 이젠 소용 없게 되었구나.”

“죄송해요, 오라버니!”

보연이가 풍원이 무릎 앞에 엎어져 서럽게 울었다.

결국 보연이는 김 참봉의 노욕에 노리개가 되고 말았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노쇠하여 제 몸 하나 추단도 못하는 늙은이가 색탐은 대단했다. 숟가락 들 힘만 있어도 그 짓을 한다는 풍문은 김 참봉 얘기였다. 대문 밖에 꽃상여가 당도해있는 늙은이가 골골거리면서도 보연이를 잠시도 그냥 두지 않았다. 여우상을 해가지고 늙은 고양이 소리를 내며 밤새 치근덕거렸다. 그러다가도 뭔가 조금이라도 자신의 마음에 흡족하지 않으면 증손녀나 다름없는 어리디어린 보연이에게 앙살을 부렸다. 늙은 여우의 변덕스러움을 고치는 유일한 방법은 뗏장을 배에 덮는 길뿐이었다.

그런 김 참봉을 여린 보연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힘에 겨운 일이었다. 그래도 보연이는 오라버니를 생각하며 꾹꾹 참아냈다. 자신 하나가 참으면 오라버니가 편하게 살 수 있을 터였다. 오라버니만 잘된다면 자신의 몸 하나쯤은 어찌되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아무리 고달파도 보연이는 오라버니 앞에서 내색을 하지 않았다.

풍원이는 그런 여동생을 보는 것이 더 힘들었다. 차라리 힘들다며 하소연이라도 하는 것이 나을 듯 했다. 풍원이는 싫다고 거부도 하지 못하고 억지로 참아내는 보연이의 모습이 떠오르기라도 하면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풍원이는 뜬 눈으로 밤을 보내며 피눈물을 흘렸다. 한시라도 빨리 돈을 벌어 늙은 김 참봉으로부터 보연이를 되찾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지고 또 다졌다. 그러려면 김 참봉네 집에서 일꾼으로 있어서는 평생이 가도 불가능했다. 김 참봉 부자는 풍원이 남매의 처지를 이용해 말로만 세경을 줄 뿐 평생 공으로 부려먹을 작정이었다. 김 참봉은 이태가 넘어 삼 년이 다 되도록 풍원이의 세경을 주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보연이를 동첩으로 삼으며 상답 서 마지기를 주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하기야 동생 판 더러운 땅을 풍원이는 애초부터 받을 생각도 없었다. 풍원이는 한시라도 빨리 김 참봉 집을 떠나기로 작정했다.

“서방님! 그만 떠나겠습니다.”

“오갈 데도 없는 것들을 거둬줬더니, 배은망덕한 놈!”

풍원이의 떠나겠다는 말에 주태 눈빛에서 독기가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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