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품을 하루 빌리려면 장정 한 사람이 하루 품을 팔아야 했다. 당장 코앞에 닥친 내 집 일을 두고 남의 집 일을 갈 수도 없었다. 어떻게 짬을 내어 소 있는 집 일을 대신 해주고 며칠 전부터 소를 미리 맞춰놔도 어그러지기 일쑤였다. 당일이 됐는데 소 주인이 자신이 써야겠다며 소를 빌려주지 않으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면 팔돌이가 소가 되어서라도 땅을 갈아야 했다. 팔돌이는 비잡이를 어깨에 걸고 앞에서 끌고 장석이는 긁쟁이를 잡고 뒤따라가며 자갈땅을 갈아엎어야했다. 어떻게라도 제때 씨를 뿌리려면 하늘이 노래지고 숨이 끊어지는 듯한 황천길을 수없이 왔다 갔다 해도 소 노릇을 해야만 했다. 가난한 것을 탓해야지 누굴 원망할 수도 없었다. 없는 것이 원수였다. 그러나 올해부터는 장석이가 온 일꾼으로 인정을 받고 온 삯을 받게 되었으니 팔돌이로서는 생각만 해도 든든한 일이었다.

보연, 김참봉 동첩이 되다

동네 사람들을 모두 불러 풍원이를 위해 꼬맹이술을 내고 난 며칠 후, 김 참봉 아들 주태가 풍원이를 은밀하게 불렀다.

“풍원아, 내 할 말이 있으니 좀 들어오너라.”

“예, 서방님!”

“풍원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런지……”

주태가 잔뜩 뜸을 들였다.

“무슨 말씀이신데 그러세요?”

“허허, 참…….”

주태는 계속해서 헛기침만 하며 말문을 열지 못했다.

“서방님, 무신 말씀인지 해보셔유!”

“나 참, 난감해서…….”

“저희 남매를 거둬주신 분인데, 서방님 말씀이라면 뭐든 따르겠습니다요.”

풍원이가 머뭇거리는 주태를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그렇게 얘기하니 내 맘이 좀 편안해지는구나. 다른 게 아니고 풍원아, 보연이를 주면 안 되겠냐?”

“보연이를 주다니요?”

“우리 집으로 보내면 안 되겄냐, 이 말이다.”

“보내다니요?”

“시집 말이다.”

“서방님이요?”

“아니!”

“그럼?”

“아버님!”

“예에?”

젊은 서방님이라 해도 기가 막힐 터에 저승길이 턱 밑에 와 있는 상늙은이에게 어린 보연이를 달라니 풍원이는 기가 막혔다. 인색하기로 인근에 소문이 뜨르르한 김 참봉이 꼬맹이술을 낸 속셈도 거기에 있었다. 오갈 데 없는 풍원이 남매를 거둔 일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도 없는 아이를 강제로 빼앗는 것처럼 동네사람들에게 보이기 싫어서였다. 김 씨 두 부자가 남의 이목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연약한 여자아이를 동첩으로 삼는다는 것은 자신들이 생각해도 염치없는 짓거리라고 생각은 했는가보다.

“보연이를 주면 잘갑논 상답 서 마지기를 네 명의로 해주마!”

“서방님, 안 돼요!”

김 참봉네 전 재산을 준다고 해도 될 일이 아니었다. 풍원이는 일언지하에 주태의 제의를 뿌리치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그날 이후 김 참봉과 아들 주태의 태도가 돌변했다. 풍원이가 하는 일마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고 까닭 없이 풍원이에게 몽니를 부렸다. 김 참봉 부자의 속셈을 빤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풍원으로서는 김 씨 부자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혼자 몸이라고만 해도 풍원이는 당장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어린 보연이가 있었다. 그것도 여자아이였다. 그런 보연이를 한데나 다름없는 곳에 떼어놓고 갈 수는 없었다. 차라리 보연이를 데리고 김 참봉 집을 떠나버릴까도 생각해보았지만 그것도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도 두 남매가 입만 겨우 얻어먹고 있는 처지에 가진 돈 한 푼 없이 떠나봐야 당장 갈 곳이 없었다. 머무를 수도 떠날 수도 없는 난감한 신세였다.

차라리 연풍 주막집 아주머니의 말을 따라 자리를 잡을 때까지 보연이를 맡겨두고 올 것을 잘못했다는 후회가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지난 일이었다. 온갖 궁리를 해봐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답답한 하루하루가 흘렀다. 그러던 중 하루는 보연이가 행랑채로 풍원이를 찾아왔다.

“오라버니! 제 걱정은 말고 서방님이 원하는 대로 하셔요.”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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