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수필가

장곡산성에서 내려와 한국 식기 박물관을 들러 바로 인근의 사운고택을 돌아보고 얼공원에 올라갔다. 얼공원 바로 옆으로 학성산성 이정표가 있다. 산성으로 올라가는 길은 팍팍한 시멘트 포장길이다. 그러나 그렇게 멀지는 않았다. 시멘트길이 끝나자 숲 속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시작된다. 그런데 이것 좀 봐라. 계단을 만든 돌이 심상치 않다. 비슷한 크기로 잘 다듬어졌다. 홍성군에서 백제부흥군길을 조성하면서 계단공사를 한 것 같은데 돌을 이렇게 다듬었을 리도 없고 최근에 다듬은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분명 성돌을 날라다가 사용한 것으로 보였다. 청주 읍성을 허물어 무심천 제방을 쌓았다는 일제나, 문의 구룡산성을 허물어 탑을 쌓은 몰지각한 사람이나, 학성산성 성돌로 백제부흥군길 계단공사를 한 홍성군이나 훼손이라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이마에 땀이 솟는다. 땀을 닦으며 얼마를 올라가니 문득 무너진 성벽이 앞을 막아선다. 어마어마한 돌무더기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돌무더기로 보아 성의 규모는 엄청났을 것이다. 아마도 높이는 8~10m정도, 너비도 2~4m 이상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돌은 자연석을 그대로 쌓은 것이 아니라 다듬어 쓴 흔적이 뚜렷하다. 성돌은 너비 40~50cm, 높이 20~30cm, 두께는 대중이 없지만 몇 개를 측정해 보니 20cm이상이었다. 정교하게 다듬은 것은 아니지만 성의 외벽은 발을 디디고 올라설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쌓았을 것이다.

이렇게 많은 돌을 어디서 옮겨 왔을까? 운반해 오는데 얼마나 많은 장정들이 동원되었을까? 그리고 이 많은 돌을 다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백성이 정과 망치에 손을 짓찧었을까? 파랗게 멍들고 피 묻은 손이 보이는 듯하다. 이렇게 높은 성을 수많은 인력을 동원해 쌓았다면 그만큼 백성에게 그 부가가치가 돌아갔을까 하는 것은 부질없는 생각일지 모른다. 백성을 위해서라기보다 쓸데없는 권력 다툼이다. 왕이 백성에게 위임 받은 권력으로 도로 권력의 주인인 백성을 괴롭힌 것이다.

성가퀴를 걸었다. 잡목과 마른 잡초에 묻힌 성벽이 축성 당시 그대로인 곳도 보인다. 가만히 살펴보니 내벽과 외벽이 모두 돌로 이루어졌다. 내벽의 모습이 뚜렷하게 남았다. 장곡산성은 외벽은 돌로 쌓았고 내벽은 흙으로 채워 넣는 방식이었는데 학성산성은 다르다. 보은 호점산성이나 삼년산성처럼 내외벽이 돌이다. 훨씬 규모가 크다는 의미이고 튼튼하게 쌓은 것을 보면 그 만큼 요새였을 것이다.

마른 잡초를 헤쳐가면서 성벽을 살펴보니 축성의 방법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본래의 형태가 남아 있는 곳이 있었다. 자연석의 한쪽 면을 다듬어서 큰 돌과 작은 돌을 서로 엇갈리게 쌓았다. 중간에 쐐기돌을 박아 넣어 성벽이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성벽은 아래 부분에 자연석을 무더기로 놓아 기초를 삼은 다음에 그 위에 좀 더 큰 돌을 다듬어 정교하게 쌓았다. 가파른 비탈에는 2단계로 쌓은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일단 널찍하게 성벽을 쌓고 그 위에 조금 들여쌓는 방법으로 쌓았다. 얼마나 정교하게 쌓았으면 아직도 무너지지 않고 1500년을 견디어 냈을까? 1978년 홍성에 일어난 강진에도 무너지지 않고 남아 있는 부분이 너무나 경이로워서 한참 서서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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