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참봉네 행랑 마당에는 소문을 듣고 모여든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잠시 후 김 참봉의 아들 김주태가 풍원이를 앞세우고 나타났다.

“여보게들! 오늘은 우리집 풍원이 꼬맹이술을 내는 날이니 맘껏들 드시게나. 그리고 오늘부터는 풍원이를 온 일꾼으로 대우해 주게나!”

김주태가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돼나가나 대놓고 하대를 했다.

“서방님, 온품꾼 얘기도 좀 들어봐유!”

“암! 당연지사지.”

마당에 둘러앉아 잔칫상을 받아먹던 사람들이 풍원이 말을 들어보자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주인공답게 말끔하게 차려입은 풍원이가 붉어진 낯빛을 하고 앞으로 나섰다.

“여러 어르신들, 고맙습니다! 저를 이 마을에 살 수 있도록 받아주시고, 오늘은 또 제가 온일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시니 여기 모이신 어르신들께 뭐라 말할 수 없이 고맙습니다. 특히 오갈 데 없는 천애고아인 저희 남매를 거두어 보살펴주시고 꼬맹이술까지 내주시며 저를 인간꼴로 만들어주신 참봉 어르신 은공은 죽어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참봉 어르신과 마을 어르신들 덕택입니다. 여러 어르신들의 은공을 갚는 일이라면 어디든 달려 갈테니 언제든 불러주세요. 백골을 갈아서라도 반드시 갚겠습니다요.”

“그놈 참 청산유술세 그려. 나선 길에 노래도 한 자루 해보거라!”

“전 노래는 하지 않을래요!”

“건방진 놈! 어른들이 시키면 잠자코 할 것이지, 무슨 잔소리가 그리 많은가?”

“여러 어르신들! 양친 부모 다 잃고 의지가지 없는 놈이 뭐 즐겁다고 노래를 하겠어요? 제가 노래를 하게 될 때는 이 다음에 큰 부자가 되어 일가를 이른 후에 할테니 여기 모이신 어른들께서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요.”

풍원이가 머리를 조아리며 마을 어른들의 양해를 구했다.

“그놈 나이는 어려도 의견이 트였네!”

“그러게 말여! 의견이 멀쩡하네!”

마을 사람들이 풍원이 말을 듣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대신 제가 어르신들께 약주를 한 잔씩 올리겠습니다.”

풍원이가 주병을 들고 좌중을 돌며 어른들에게 술을 따랐다.

“풍원아! 여기 팔돌이한테도 한 잔 따르거라!”

김주태가 좌중을 돌고 있던 풍원이를 불렀다.

“여봐 팔돌이! 풍원이는 열여섯인데도 머리를 올리는 데 자넨 장석이 꼬맹이술 언제 낼텐가?”

김주태는 자신보다도 훨씬 연배인 팔돌이에게 하대를 했다.

“낼래도 개뿔도 뭐가 있어야…….”

팔돌이가 풀이 죽어 말끝을 흐렸다.

“하기야, 자네 주제에…….”

김주태가 비아냥거렸다.

팔돌이네는 지금 사면초가였다. 지난해부터 장리 빚으로 여기저기서 빌려다 먹은 양식이 대추나무 연 걸리듯 줄줄이 걸려 있었다. 장리쌀을 갚지 못해 이자에 이자가 새끼를 쳐서 원전보다도 몇 곱절이나 불어나 있었다. 팔돌이의 유일한 희망은 올해는 장석이와 함께 힘을 보태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장리쌀을 갚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팔돌이의 바람일 뿐 갚을 길은 까마득하기만 했다. 빚을 갚기는커녕 똥 싸게 일을 해도 이자조차 꺼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지경이니 동네사람들을 불러 아들놈 꼬맹이술을 낼 여력이 있을 턱이 없었다. 장석이는 팔돌이의 맏이로 풍원이보다 두 살이 위인 열여덟 살이었다. 왜소한 풍원이에 비해 장석이는 덩치도 우람했고 심덕도 펑퍼짐하니 틀스러웠다.

“팔돌이! 그러지 말고 오늘 이 자리서 장석이도 풍원이하고 머리를 올려!”

팔돌이 이웃에 사는 기춘이가 말했다.

“누구 맘대로 남의 상에 슬쩍 숟가락을 올려놓으려는 게여? 그건 도둑놈 심보여!”

그때 김주태가 낯빛을 바꾸며 매몰차게 말했다. “아따, 서방님! 어차피 다 차려진 상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꼬맹이술 낸다고 말만 한 마디 하면 될 것을 뭘 그리 정색을 하십니까요?”

기춘이가 말했다.

“자네 아주 배가 부르구먼. 올해도 내 도지를 부치려나?”

김주태가 싸늘한 표정으로 기춘이를 노려봤다. 기춘이가 독사 같은 주태의 눈초리를 피해 상에 코를 박았다. 주태네 땅을 부쳐 먹고 있는 기춘이로서는 식구들 명줄을 쥐고 있는 주태에게 밉보였다가는 당장 도지가 떨어질 판이니 국으로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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