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부모님을 모두 잃고 의지가지없는 천애고아가 되었지만, 황량한 벌판 같은 세상에서 주막집 아주머니를 만난 것은 천행 중 천행이었다.

풍원이는 주막집에서 일을 거들며 기회가 생길 때마다 장사꾼들을 따라 새재 너머 영남 땅인 문경에도 가보고 인근에서는 가장 큰 고을인 충주에도 가보았다. 그런 큰 고을들은 이제껏 산골에서만 살아왔던 풍원이에게는 별천지였다. 넘쳐나는 물건들과 끊임없이 오가는 사람들로 저자거리는 보고만 있어도 속이 든든하고 가슴이 설레었다. 아주머니도 주막이 한가해질 때면 단골 봇짐꾼들에게 청을 넣어 풍원이가 다른 지역을 구경하며 견문을 넓힐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렇게 여러 장터를 돌며 풍원이는 장차 장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혀갔다.

“풍원아, 주막이 팔렸구나.”

가을걷이가 막 시작될 무렵 연풍 주막집이 팔렸다.

“어디로 가실 참인가요?”

“신풍에 밭뙈기를 조금 마련했다. 거기서 닥 농사나 지어볼까 한다.”

신풍은 연풍에서 북쪽으로 서너 마장 떨어진 곳으로 예전부터 종이 산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래서 마을 전체가 온통 종이 원료가 되는 닥나무 재배를 많이 하는 곳이었다. 닥나무는 한번 심어놓으면 매년 곁가지를 잘라 쓰면 되었으므로 그렇게 많은 품을 필요로 하는 농사가 아니었다.

“너는 어쩔 셈이냐? 나랑 같이 가겠니?”

아주머니가 풍원이에게 물었다.

풍원이도 자신의 앞날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까지고 사내놈이 주막집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며 군식구처럼 얹혀 살 수만은 없었다. 그렇다고 아주머니를 따라 닥 농사를 짓고 종이 뜨는 일이나 배워 그걸로 평생을 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장사를 해서 큰돈을 벌겠다는 풍원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젠 결딴을 내려야 할 때가 온 것이었다.

“이제 저도 제 앞가림은 스스로 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밑천이 마련되는 대로 장사를 한번 해볼까 합니다.”

“남자라면 세상에 나와 제 일을 해서 일가를 이뤄야지, 언제까지고 허드렛일이나 하며 세월을 보낼 수는 없는 일이지. 내가 넉넉하면 장사 밑천이라도 대주겠지만 그렇지도 못하고…….”

“그렇게까지 생각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지금가지 저희 남매를 거둬주신 은혜만 해도 평생 갚아도 모자랍니다. 이다음에 부자가 되면 아주머니 은혜를 반드시 갚겠습니다.”

“은혜는 무슨! 곤경에 처했을 때 서로 돕는 것은 당연하지.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짐승과 다를 것이 뭐가 있겄냐? 이런 시절에 어려운 사람끼리 돕지 않으면 힘없는 사람들은 살아가기가 너무 팍팍하지.”

“저희 남매는 아주머니를 만나 천행으로 살아났습니다.”

풍원이는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하며 머리를 수그렸다.

“그래, 보연이는 어쩔 참이냐?”

“데리고 가야지요.”

“딱히 갈 곳도 없잖냐?”

“일단 고향 인근으로 가볼까 합니다.”

“그려. 까마귀도 고향 까마귀가 반갑다고, 그래도 고향이 타관보다야 낫겠지.”

연풍 주막집 아주머니는 풍원이 남매와 헤어지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며 자리를 잡을 때까지 만이라도 보연이를 자신에게 맡겨놓으라고 했지만 풍원이는 그럴 수 없었다. 천지간에 혈육이라고는 단 둘 뿐이었다. 그런 동생을 타관에 떼어놓고는 불안해서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굶어도, 먹어도 함께 하는 것이 피붙이였다.

“보연아, 고향으로 가보자.”

“저도 오라버니를 따라갈래요.”

보연이도 오빠와 떨어져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주머니, 꼭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걱정일랑 말고, 어딜 가있든지 그저 몸만 성하면 산다. 몸 조심하거라!”

풍원이는 꼭 은혜를 갚겠다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아주머니의 당부 말에 끝을 맺지 못했다.

풍원이와 보연이는 그동안 살던 연풍 땅을 떠났다. 네 사람이 왔던 연풍을 어린 두 남매만 동그마니 남아 떠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주막집 아주머니가 눈물을 훔쳤다. 그 곁에서는 분옥이가 영문도 모르고 손을 흔들며 두 사람을 배웅했다. 풍원이도 보연이도 가던 길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몇 번이나 손을 흔들어 답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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