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하고 답답한 겨울이 그렇게 더디게 지나갔다.

아무리 눈이 첩첩이 쌓여도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들었다. 봄이 오고 새재길이 뚫리자 길손들의 왕래가 잦아들며 주막집도 덩달아 바빠지기 시작했다. 풍원이는 주막집 아주머니의 호의가 고마워 집 안팎을 살피며 몸을 사리지 않고 일을 했다. 보현이도 아주머니를 도와 부엌에서 허드렛일을 도왔다.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일에 몸은 고달팠지만 공밥을 먹고 놀던 지난겨울을 생각하면 마음은 편했다. 어머니마저 잃고 세상천지 의탁할 곳이 없어 세상이 허허벌판처럼 느껴졌지만, 그래도 주막집 아주머니가 있어 든든했다.

풍원이는 주막집에서 일을 하면서 새재 넘어 한양과 영남을 오가는 길손들을 통해 새로운 이야기를 듣는 것이 무엇보다도 좋았다. 그들이 하는 모든 이야기가 신기하기만 했다. 언젠가는 자신도 새재를 넘어 영남 땅에도 가보고 조선에서 제일 크다는 한양 땅에도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풍원이는 자신도 길손들처럼 팔도를 바람처럼 누빌 날을 상상하며 혼자 꿈에 부풀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집도 절도 없는 남매를 거둬준 아주머니를 생각하면 염치없는 짓거리였다. 그런 허황한 생각을 하는 것조차 아주머니에게 죄만스러웠다. 하지만 언젠가는 저들처럼 조선 팔도를 맘껏 휘저어보겠다는 마음을 다져먹었다.

주막집은 눈길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사람 손이 가야할 일거리였다. 더구나 여염집도 아니고, 수많은 길손들의 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주막이다 보니 아주머니 혼자서는 하루 종일 동동거려도 표도 나지 않았다. 튼실한 남정네 도움이 절실했다. 그런데도 주막에는 남자가 없었다. 언제나 아주머니 혼자 주막집 안팎을 돌아치며 모든 일을 꾸렸다. 이따금씩 아주머니를 찾아오는 남자가 있기는 있었다. 아주머니는 그가 분옥이 아버지라고 했다. 그는 주막에서 하루 이틀 밤쯤 머물다가 사라지곤 했다. 그러니 주막집을 건사하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주머니에게는 분옥이라는 딸이 있었다. 나이는 보연이보다 두세 살쯤 어려 보이는 아직도 젖 냄새가 가시지 않은 어린 아이였다. 겉으로는 멀쩡해보였지만 분옥이는 약간 모자란 아이였다. 그러니 아주머니에게 도움이 되기보다 짐이 되었다. 그래도 아주머니는 분옥이를 끔찍하게 여겼다. 여자들만 있는 주막집에서 아직은 약병아리 같은 사내 아이였지만 풍원이가 유일한 남자였다. 그래도 사내뼈대라고 주막집에서 남자가 해야 할 일을 제법 해내고 있었다. 아주머니도 은연중에 풍원이를 많이 의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머니가 갑자기 주막집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며칠간 어딘가를 다녀왔던 날이었다. 점심나절부터 술을 마시던 아주머니가 풍원이를 불렀다. 이제껏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아주머니 모습이었다. 주막을 하고는 있었지만 숱한 길손들의 요구에도 손님상에 앉아 탁배기 한잔 어울리는 법이 없던 아주머니였다. 그런 아주머니가 무슨 일인지 주막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술상을 차려놓고 혼자 술을 마셨다. 삽작 마당은 삼관문을 타고 내려온 땅거미로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풍원아, 첨 보재?”

“뭘요?”

“이 아주매 술 먹는 거!”

“예에-.”

“분옥이 아부지가 며칠 전 죽었구먼.”

“예?”

“오늘 그 사람 상을 치렀고.”

아주머니의 표정에서 허허로움이 진하게 묻어났다.

“실은 그 사람, 분옥이 아부지가 아니다.”

“예?”

풍원이가 연거퍼 놀라며 아주머니를 바라다보았다.

“어린 아한테 이 아주매가 주책이지?”

“예?”

이번에는 영문을 몰라 풍원이가 되물었다.

“주막집에 오던 그이가 첫 남편은 맞지만 첫 남자는 아니었단다. 그 사람에게 시집가기 전부터 고향에서 만나던 남자가 있었다. 그런데 중매가 들어오자 나는 분옥이 친부와 함께 멀리 도망을 가기로 약속을 하고 있었다. 이를 눈치 챈 친정아부지가 날 가뒀다가  그 집으로 억지시집을 보냈단다. 난 내 뱃속에 아이가 있는 줄도 모른 채 시집을 갔고, 달도 한참 모자란 갓난쟁이를 낳았단다. 시집이 발칵 뒤집혔지. 새색시가 시집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남의 씨앗을 낳았으니 얼마나 황당했겄냐?”

“예에-.”

어렴풋 아주머니의 처지를 느낄 수는 있었지만, 풍원이는 그게 어떤 상황인지 확실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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