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통대학교 행정학과

대선이 본격화되면서 공무원은 줄 서고, 기업인은 눈치 보고, 교수는 후보에게 달라붙고 있다고 한다. 이에 후보 진영에 붙어 있는 폴리페서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유력 대권 주자 진영에 1,000여 명의 대학 교수가 진을 치고, 다른 당 후보에게는 700여 명의 대학 교수가 직간접으로 자문한다고 하니 그럴 만하다.

인터넷 사전은 폴리페서(Polifessor)를 ‘정치(politics)와 교수(professor)의 합성어. 적극적으로 현실 정치에 뛰어들어 자신의 학문적 성취를 정책으로 연결하거나 그런 활동을 통해 정계나 관계의 고위직을 얻으려는 교수를 일컫는 신조어다. 정권의 필요 때문에 발탁된 관료인 테크노크라트(technocrat)와 구별된다.’라고 하고 있다.

폴리페서는 한국에만 있는 용어로 우리 정치문화의 산물이다. 우리의 정치구조가 선거캠프와 대통령 인수위원회를 중심으로 장차관 임명, 국회의원 공천, 정부 산하기관장 추천 등의 논공행상으로 관직을 부여하고 있으니 권력을 추구하는 교수가 선거캠프나 인수위원회에 줄을 대고자 혈안이 된다.

교수의 현실 참여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하나는 행동하는 양심, 실천 학문의 입장에서 공익을 위해서 비판의식을 가지고 참여하는 것이다. 이들은 정권과는 무관하게 비판하거나 정책 공동체의 자문기능을 주로 한다. 다른 하나는 개인의 권력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수단으로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폴리페서는 후자를 의미한다.

 폴리페서는 자신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어떤 상황에서든 정치 자산을 만들려고 노력한다는 면에서 교수에서 정치인으로 직업을 바꾼 사람과 비슷한 성향을 가진다. 그러나 폴리페서는 교수와 정치인이라는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 그 결과 폴리페서 교수의 교육에 대한 관심이 문제가 된다.

폴리페서에 대하여 대학은 대학의 명예를 높였다고 축하연도 하고 휴직도 용인한다. 대학에 폴리페서가 없으면 겸임교수, 초빙교수의 명목으로 폴리페서를 영입한다. 우리의 폴리페서 문화는 이들을 이용하려는 정치인, 교수의 권력 욕구, 대학의 조장과 매스컴의 인기몰이가 만든 한국적 문화이다.

혹자는 최초의 폴리페서로 공자를 지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공자나 맹자가 정치를 논의하고 위정자에게 자문하는 것은 자신의 권력욕을 충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면에서 폴리페서라 할 수 없다.

우리는 박근혜 최순실 사태의 핵심에서 정권 유지와 연장의 부역자 역할을 한 폴리페서를 보았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의 와중에서 지금도 폴리페서가 되어 대권 주자와 사진 찍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문화가 중단되지 않고 있다는 것에서 우리 정치가 3류, 대학이 4류가 되는 이유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학문이 과학이란 이름으로 인간 문제 사회문제를 등한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대학교수가 그 직분을 교육과 제자에 대한 사람보다 정치인에 빌붙어서 자기의 영달을 위해 이용하는 것은 더 바람직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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