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수필가

장곡산성은 장곡면 대현리에서 시작한다. 마을회관 앞 공터에 주차하고 시멘트포장길을 따라 걷는다. 장곡산성은 해발 255m 산줄기에 포곡식으로 쌓은 둘레 1천352m의 비교적 큰 규모의 산성이다. 문지에서 양쪽을 살펴보니 윤곽이 뚜렷한 산성이 보인다. 서문에서 남쪽을 향하여 성벽 위를 걸었다.

성벽은 매우 가파른 산비탈에 돌로 외벽을 쌓고 안쪽은 흙으로 채웠다. 외벽 산비탈엔 나무가 빼곡히 들어서서 밖이 보이지 않았으나, 서쪽으로 바다를 통하여 들어오는 길머리가 모두 보일 것 같았다. 지팡이로 낙엽을 긁어냈다. 드러난 성돌은 정교하지는 않았지만 다듬어 쓴 흔적이 뚜렷하다.

산성은 동쪽인 광시면 쪽 골짜기가 틔어 있는 것으로 보아 서쪽에서 오는 당이나 고구려의 적을 방어하는 용도였던 것이 분명하다.

성의 내부 골짜기는 넓지 않았으나 건물지도 있고 수초에 묻힌 저수지도 보였다. 저수지 부근에 우물 같은 웅덩이도 있다. 우물 주변에 사람이 살았던 집터가 최근까지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흔적이다. 건물이 있던 자리의 석축 모습, 감나무, 뽕나무, 앵두나무, 두릅나무 등 살림살이의 자국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직도 넓고 펀펀한 건물지는 산성이 있던 당시에 큰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의 규모로 보아 골짜기는 그리 넓지도 않고 상주하는 사람이나 주둔한 군사가 임존성이나 운주산성만큼 많았던 것 같지는 않았다.

홍성 사람들은 이 산성을 달리 ‘석성산성’이라 부르면서 백제부흥운동의 마지막 근거지인 주류성이라고 주장한다. 백제 부흥운동의 과정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대련사를 세운 스님 도침, 왕족 복신, 장군 흑치상지, 의자왕의 왕자 부여풍 등의 행적과 공적, 그리고 맹약에서 배신에 이르기까지 과정과 부흥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역사적 사실에는 이의가 없으나, 이들의 마지막 은신처 또는 부흥운동의 거점인 주류성이 어디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설이 여러 가지이다.

홍성 사람들은 학자들의 주장을 근거로 이곳 장곡산성이 가장 확실한 주류성이고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이었다고 주장한다. 장곡산성을 주류성으로 보는 근거는 김정호의 대동지지 홍주목조에서 “홍주목은 본래 백제 주류성인데, 당이 지심주라고 고쳤다”라고 한 것과 ‘건지산성은 고려시대에 축성되어 조선시대에 폐성이 되었다’는 충청매장문화연구원의 건지산 조사보고서를 근거로 장곡산성을 주류성으로 보고 건지산성이 주류성이라는 설을 부정하였다. 내포 문화 사학자인 박성흥은 이 성을 답사하고 주류성은 바로 장곡산성이고 백강은 당진 해안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다.

나도 전에는 문헌 자료를 보고 장곡산성이 주류성일 가능성을 믿었으나 오늘 답사 결과 그 믿음이 희미해졌다. 그래도 장곡산성은 서해안으로부터 들어오는 적으로부터 수도를 방어하는 요새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임존성에서 홍성의 소구니 산성, 태봉산성, 학성산성, 장곡산성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일련의 산성들이 마치 하나의 전선이 되어 수도인 사비성이나 웅진성 가까이에서 방어하고 있는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주요거점이나 마지막 저항지는 아니더라도 당연히 백제 부흥군의 주둔지가 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백제 부흥은 실패로 돌아갔고 지금은 신라와 백제를 가를 필요가 없는데 확실한 근거도 없이 서로 자기 고장이라고 싸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아무튼 산성이 많은 홍성과 예산의 백성들도 편안한 삶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학성산성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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