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청주민예총 사무국장

어릴 적 국경일만 되면 아침 일찍 일어나 태극기를 달았다. 학교에서 태극기를 나눠 주었고 태극기를 다는 방법과 이유에 대해 배웠다. 어린 마음에 태극기를 달면서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88서울올림픽 당시 나는 중학생이었다. 시골 촌놈으로 태어나 시골 중학교에 다녔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것도 몰랐고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흑백 TV로 인민군이 두더지로 변하는 만화영화를 보고 삐라를 주워 공책을 받기도 하고 평화의댐 성금으로 어머니 금반지를 가져가기도 했다. 내가 아는 세상은 북한의 도발 위험에 직면한 개발도상국의 선두주자 올림픽 개최국 대한민국이었다.

개발도상국의 이면을 접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에 올라가서였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할 때 우연히 문학을 접하게 됐고 당시 대학에 다니는 선배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와 노래를 들으며 막걸릿잔을 기울였다. 그렇다고 달라진 건 없었다. 아주 먼 옛날이야기처럼 세상은 조용했다. 1996년 새벽, 연세대학교 건물에서 학생들이 머리에 손을 올린 채 줄줄이 끌려 나왔다. 나는 그들을 지켜보며 방독면을 쓴 채 방패를 들고 서 있었다. 최루탄 가루가 바람에 날려 코끝이 매웠다. 영화처럼 특공대가 옥상에서 로프를 타고 창문으로 진입했다. 나는 그때 방패를 던지고 소리쳐야 했었다. 나는 두 세계 속에서 혼란스러웠다. 제대 후 나는 김남주 평전과 자본론을 읽으며 이해 불가능한 두 세계에 대해 고민했다. 유시민이 쓴 ‘나의 한국현대사’에는 우리 역사의 두 주체를 ‘5·16과 산업화 시대를 대표하는 세력’과 ‘4·19, 5·18과 민주화시대를 대표하는 세력’으로 구분하고 있다. 참 일리 있는 이야기다. 이는 박정희의 평가가 경제성장의 주역과 독재자로 나뉘는 것과 유사하다. 

최근 태극기를 들고 거리에 나서는 이들은 박정희 시대를 그리워하는지 모른다. 그들은 새마을 운동의 주역이었고, 베트남전에 참전한 용사였으며, 해외 파병 근로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5·16과 산업화 시대는 국민을 자본의 노예로 만들고 병들게 했다. 권력자와 자본가는 권력과 자본 증식을 위해 국민을 개나 돼지로 여겼다. 사료를 먹는 개돼지가 됐다고 자신은 개돼지가 아니라고 착각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그렇다면, 현재 40대는 어디에 속할까. 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두 세력에 동참하는 일은 개인적 소신에 좌우할 것이다. 그러니 ‘미친개들은 사살해야 한다’는 40대 도의원의 망언에도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소신보다 권력과 자본에 이끌리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에 회의를 느끼는 것이다. 이 세력은 독재, 권력남용, 정경유착, 성추행, 민간인사찰 등 수많은 비리를 자본으로 뒤덮어 버린다. 그쯤은 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우리는 대통령을 불쌍히 여기는 시대를 맞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언제부터 태극기를 달지 않았을까. 친일파의 나라임을 알고부터였을까.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독립운동가와 후손을 알고부터였을까. 국민을 위한 국가가 아님을 알고부터였을까. 온전한 역사를 외면한 채 권력자의 왜곡된 역사를 알고부터였을까. 오늘이 지나면 세상은 어떻게 달라질까. 자랑스럽게 태극기를 달고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서는 날이 오길 바라는 소시민의 작은 마음이 태극기와 촛불 앞에 흔들리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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