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파들의 학문적 호기심은 사회 개혁을 위한 실천운동으로 발전하게 되고, 이들은 이론적 지식과 신앙생활을 공고하게 하기 위해 이승훈을 북경으로 파견했다. 일천칠백팔십사년 평택현감이었던 이승훈은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조선으로 돌아와 교회를 세우고 본격적인 포교활동을 벌인다. 일천칠백팔십오년 명례방에서 신앙집회를 가지다 적발되어 다른 사람들은 양반이라 훈방되고 김범우만이 중인이라는 이유로 귀양을 가던 중 장독으로 죽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사회 개혁의지가 높았던 시파와 개혁을 절대기치로 삼았던 정조와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벽파의 예봉을 피해갈 수 있었다. 또한 시파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무고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벽파와 대립하여 목숨을 걸고 영조에게 간언한 사람들로, 정조에게 있어서는 은인인 동시에 충신들이었다. 하지만 벽파는 조선은 사대부에 의한 통치라는 전통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기에 왕권강화를 통해 개혁을 하려는 정조에게 끊임없이 저항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조는 자신의 개혁의지를 실현하기 위한 힘을 기르기 위해 친위세력으로 시파를 정계에 중용했다. 정조로서는 시파를 옹호하는 것이 당연했고, 웬만한 위법을 저질러도 관대하게 눈을 감아주었다. 이러한 시파들에 의해 자연적으로 천주학이 전파되었다.

조선에서 천주학에 대한 최초의 박해는 신해사옥이었다.

일천칠백구십일년 전라도 진산 땅에서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하여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의식을 무시한 사건이 일어났다. 윤지충은 정약용의 외사촌이었다. 그는 정약용의 인도를 받아 천주학에 입문했다. 개국 이래 사백년 동안 조선을 통치해온 이념의 근간은 효와 충이었다. 효와 충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스스럼없이 버리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던 조선의 가장 핵심적인 덕목이었다. 그중에서도 효를 더욱 중시하여 모든 행동의 근본을 효로 삼았다. 그래서 부모상을 당하면 벼슬을 단념하고 곧바로 낙향을 했으며, 임금도 신하를 잡지 않았다. 이런 사회에서 백성의 표상이 되어야 할 양반이 조상을 우상숭배로 간주하여 어머니 신주를 태우고 초상을 치루지 않았으니 이는 능지처참할 강상죄였다. 또한 천주학은 양반과 상민, 그리고 남녀 차별이 없는 만민평등을 주장했다. 이 또한 조선의 통치기반을 위협하는 일이었다. 조선은 철저한 신분 사회였다. 그러니 천주학이 주장하는 전례의 문제와 평등사상은 지금까지 지켜져 내려오던 조선의 뿌리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것이었다. 윤지충 사건으로 벽파 뿐 아니라 시파의 일부 양반들까지 사회 풍기를 문란하게 하고 기강을 해이시키는 천주학을 사학(邪學)으로 단정하고 척결을 주장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나라의 근본을 흔드는 천주학을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이 초기 박해의 주된 요인이었다. 벽파는 천주학을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 불효불충의 사교로 몰아부쳤다. 유교를 신봉하는 벽파로서는 당연한 일이었고, 천주학을 믿던 시파들에게도 치명적인 사건이었다. 이 일로 벽파와 시파는 격렬하게 대립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정조는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시파의 손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 벽파가 주장한 것은 조선을 지탱해 온 중심 사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천주학을 믿던 많은 시파 실학자들은 임금으로부터 배교를 강요받고 개종을 했다. 그리고 윤지충은 처형되었다. 그러나 벽파가 천주학을 이단으로 몰아 단죄를 한 이면에는 시파의 기세를 꺾고 정조의 개혁 정책에 타격을 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이로써 신해사옥으로 불거진 천주학에 대한 문제는 일견 해결된 듯했다.

그러나 시파의 바람벽이던 정조가 갑자기 죽고,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정순왕후는 벽파와 손을 잡고 수렴청정을 함으로써 다시 벽파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일천팔백일년, 순조가 즉위하자마자 수구적인 성향의 벽파는 진취적 성향의 시파를 무력화시키고 자신들의 위치를 공고하게 하기 위해 신유박해를 일으켰다. 표면적으로는 유교국가인 조선의 전통적인 이념체제를 와해시킨다는 죄목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자신들의 통치 이념에 대립하는 시파를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이 더 컸다. 그것이 조선에서 천주학이 혹독하게 박해를 받은 이유였다. 순조 원년에 있었던 신유박해로 이승훈과 정약종, 그리고 중국인 신부 주문보가 사형을 당했고, 정약용과 정약전은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개혁을 추구하던 시파 세력은 급속하게 퇴조했다.

이때 청풍 인근에 있는 제천 구학에서 황사영 백서사건이 일어났다. 조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신유박해의 참상을 북경에 있는 구베아 주교에게 알리려다 발각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황사영 역시 참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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