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통대학교 행정학과

스타인벡(Steinbeck, John Ernst)의 소설을 유명하게 만든 영화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가 있다. 영화는 1930년대 세계 대공황을 배경으로 가난한 소작인 가족 조드 일가가 오클라호마에서 쫓기듯이 집을 떠나서 캘리포니아로 희망을 찾아서 가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땅과 일자리와 존엄을 찾기 위해서 온 캘리포니아 주는 노동자에 대한 착취가 있는 고통의 땅이었다. 소설과 영화는 이 고통의 땅에서 불행한 사람들이 함께 인간성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자본주의와 산업혁명의 모순에 의해서 말살된 인간성과 그 말살된 인간성에서 피어나는 함께하는 공동체 의식이 인간 심연에 존재하는 인간애를 일깨우고 있다.

심리적 현상으로 분노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도 일어나지만, 대부분 상대가 있다. 즉 분노는 특정한 상대에게 분개하여 몹시 성을 내는 심리적 현상이다. 분노의 포도는 인간이 분노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분노하는 마음속에서 그 상대를 없어지도록 해야 함을 보여준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이 분노가 극에 달하고 있다. 극에 달한 분노는 증오가 되어 서로를 시기하고 비난을 한다. 집단 심리학에서 증오는 우정이나 존경보다 사람들을 더욱 단결시킨다고 한다. 이 증오는 쾌락을 자극하기도 한다. 분노가 증오가 되어 서로를 증오하는 것에서 쾌락을 느끼게 하는 체계적 조직이 지금 우리의 정치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사회를 분노하게 하고 대통령과 정치인들은 분노를 자극하여 서로를 증오하도록 하고 있다. 분노를 포도송이처럼 키워서 얽히고 얽혀서 풀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서양 속담에 증오에는 약이 없다고 한다.

정치인들은 약도 없는 사회적 분노와 증오라는 병을 키우고 있다.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역할을 해야 하는 정치가 분노를 키우니 존경받는 정치인이 만들어지지 못하고 정치인에 대한 증오만 키우고 있다.

그 정치를 바로잡고 사회 정의를 세워야 할 사법부와 법조계까지 우리를 분노하게 하고 있다. 변호인이란 이름으로 정의를 무시하고, 유전무죄 무전유죄에 유권무죄 무권유죄(有權無罪 無權有罪)를 진리로 만드는 로펌과 법조계를 보면서 우리의 분노와 증오는 상대를 잃어가고 있다. 헌법사와 판례에 길이 남을 변론을 하기보다 헌법재판소를 조롱하고 폄하하는 원로 변호인의 꼼수를 보면서 이들이 지금까지 만든 사회가 더는 존재하지 않기를 희망한다. 우리는 그 희망의 불꽃이 헌법재판소이기를 원하고 있다.

지금 정치인들과 그 정치인들의 하수인들이 서로를 분노하게 하고 마지막 남은 희망인 헌법재판소까지도 증오의 대상으로 만들고자 한다. 이 분노의 포도송이로부터 벋어나기 위해서 진정한 자유와 정의가 무엇인지를 정치인과 가진 자의 눈이 아닌 자신의 눈으로 성찰하고, 그 내면의 소리에 따라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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