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동산을 넘고, 맑은 개울을 건너고 얼마를 갔을까, 어머니 눈앞에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나타났다. 옛날 살던 도화동 집과 너무나 흡사했다. 그러나 집의 규모는 엄청나게 컸다. 어머니는 마치 자신의 집을 들어가듯 스스럼없이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그 안에는 셀 수도 없을 만큼 화려하게 치장된 기와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고, 잠자리 날개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한유롭게 거닐고 있었다.

그런 마당과 대문을 몇 개나 지났을까, 어머니 눈앞에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눈앞에는 팔영루 벽서사건으로 아들이 죽자 사랑채 대들보에 목을 매 자결한 시아버지가 나타난 것이었다. 더욱 놀란 것은 시아버지의 복색과 앉아있는 자리였다. 시아버지는 노란 금실로 짠 금룡포를 입고 계셨고, 머리에는 금관을 쓴 채 엄청나게 너른 대청에서 꽃같은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화려한 의자에 앉아 계셨다. 풍원이 어머니가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려고 했지만 마음뿐 발이 움직이지 않았고, 그런 며느리의 모습을 시아버지는 그저 빙긋이 웃으며 바라만 보고 계셨다.

“어째 벌써 왔느냐?”

“아버님! 여기가 어딘가요?”

“…….”

시아버지는 며느리의 물음에 대답 없이, 그저 빙긋이 웃기만 했다.

“아직은 여기 올 때가 아니다. 돌아가 아이들을 좀 더 보살피다 나중에 오거라.”

시아버지의 말씀이 마치 음악처럼 사방에서 감미롭게 들려왔다. 말씀이 끝남과 동시에 주변의 집들과 사람들이 일시에 사라지며 사방이 깜깜해졌다.

“아버님! 아버님!”

풍원이 어머니가 안타까움과 아쉬움에 마구 소리를 질렀다. 발버둥을 치다 눈을 뜨니 눈앞에는 어떤 사람이 서있었다. 풍원이 어머니는 재차 놀라며 기겁을 했다. 그 사람의 등 뒤에서 환한 불빛이 빛나고 있어 얼굴을 자세하게 볼 수 없었다. 그가 어머니에게 손짓을 하며 따라오라는 시늉을 했다. 그제야 어머니는 자신이 길을 잃고 산중에서 헤매다 벼랑에서 떨어졌던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좀 전에 일어났던 모든 일이 꿈속이었음을 알았다. 그리고 지금 자기 앞에 웬 사람이 서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겁이 덜컥 났지만 그런 것에 연연할 처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수리골 움막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풍원이와 보연이 얼굴이 떠올라 이것저것 가릴 겨를이 없었다. 어머니가 그 사람을 따라 일어섰다. 그 사람이 발걸음을 옮길 적마다 깜깜한 주위가 대낮처럼 훤하게 밝아졌다. 그 사람은 몇 개의 산을 넘어 수리골 움막까지 어머니를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는 홀연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어머니는 그 사람이 천주님이라고 확신했다.

“내가 그날 넝청에서 떨어져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도 다 천주님이 돌본 까닭이여. 저승 문턱에서 나를 되돌려 보낸 시아버님도 그분이 변신한 것이고, 나를 그 깜깜한 밤에 집까지 데려다 준 분도 그분이여!”

그 일을 겪은 이후 풍원이 어머니는 뭐든지 천주님 뜻대로였다. 그러면서도 풍원이가 천주학을 믿는 것은 반대했다. 천주교를 믿다가 까딱 잘못되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대박해가 지나간 지금도 천주교를 믿는 것은 역적죄에 버금가는 큰 죄였다. 어머니 자신은 모든 것을 천주님에게 맡겼지만, 아들의 목숨에 관해서는 천주님보다 더 중하게 생각했다.

처음부터 조선에서 천주학을 탄압한 것은 아니었다.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천주학을 조선에 소개한 계층은 임금의 명으로 북경을 오가던 사신들로 양반들이었다. 이들이 당시 중국에 들어와 있던 서양 문물과 함께 천주학을 조선으로 가지고 왔다. 이들은 대부분 조정의 통치체제에 불만을 가지고 부패한 조선사회의 개혁을 추구하던 시파계열의 남인들이었다. 이러한 진보성향의 시파와 대립하여 기존 체제를 유지하려고 했던 중심 보수 세력이 노론계열의 벽파들이었다. 건국이후 지금까지 조선사회를 유지해오던 전통적인 유교 이념과 보수적인 양반들의 통치로 곳곳에 병폐가 만연했다. 지배층이었던 벽파 양반들은 공리공론에 빠져 명분만 내세우며 정쟁에만 골몰했다. 그러니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벽파들에게 개혁의지는 없었다. 오랫동안 조선을 지배해왔던 보수적인 벽파 양반들과 낡은 유교 이념으로는 현실의 여러 모순들을 극복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이 무렵 중국을 통해 들어온 신문물과 서학은 새로운 사회 질서를 갈구하던 시파들에게 더없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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