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이가 아직은 어려 일을 할 수가 없어서였기도 했지만, 아들을 잃고 나서 정신을 놓아버린 할머니를 혼자 움막에 두고 화전밭에 나갈 수가 없었다. 한나절이나 되었을까. 움막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간간이 들려왔다. 워낙 궁벽한 산골이다 보니 대낮에도 짐승들이 움막 주변을 지나다니곤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산짐승이 우는 소리로 생각했다. 하지만 뭔가 짐승 소리와는 달랐다. 자지러지는 듯 들려오는 소리는 잔뜩 겁에 질린 보연이의 울음이 분명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정신없이 움막 쪽으로 내달렸다. 어머니와 풍원이가 움막 앞에 다다랐을 때 두 사람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기겁을 했다.

움막 앞에 늑대 두어 마리가 있었다. 그중 송아지만한 늑대가 할머니와 보현이의 머리 위를 훌훌 타넘으며 혼을 빼고 있었다. 할머니가 막대기를 휘두르며 쫓아보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약한 구석을 눈치 챈 늑대는 오히려 더 겅중겅중 뛰며 정신을 빼앗고 있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할머니 꽁무니에 매달려 있던 보현이를 물어 챘다. 순식간이었다. 보현이를 입에 문 채 늑대가 달아나려 하자 할머니는 죽자 사자 늑대 꼬리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사나운 늑대를 할머니가 당해내지 못하고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그때 마침 움막 앞에 당도한 두 사람도 늑대에게 달려들었다.

어머니는 늑대 목에 대롱대롱 매달리고, 어린 풍원이는 응시 물은 늑대의 입을 벌리기 위해 돌로 늑대 머리를 필사적으로 내려쳤다. 늑대가 무서운 짐승이라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단지 보연이를 구해야만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한참 드잡이를 한 후에야 늑대는 견딜 수 없었던지 물었던 보현이를 포기하고 숲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할머니는 이미 늑대에게 온몸을 물려 심하게 상처를 입고 있었다. 결국, 할머니는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풍원이, 자알…… 키우거라.”

임종 직전 반짝 정신이 돌아온 할머니는 마지막으로 풍원이를 부탁하는 말을 남기고 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 갑자기 당한 일에 풍원이네가 어찌할 바를 몰라 넋을 놓고 있을 때, 골짜기 여기저기 흩어져 살던 천주교인들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할머니 모시는 일을 자기 일처럼 해주었다. 천만다행이었다. 그들은 할머니의 시신이 모셔져 있는 움막 안에 둘러앉아 성가를 불렀다. 사람이 죽었는데 노래를 부르는 이상한 장례식은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천주여 영령을 긍련이 여기소서

그리스도여 영령을 긍련이 여기소서

천주여 영령을 긍련이 여기소서

그리스도여 우리를 들으소서

그리스도여 우리를 들어 허락하소서

천주 성신이여

영령을 긍련이 여기소서

삼위일체신 천주여

영령을 긍련이 여기소서

어린 풍원이가 보기에도 천주교인들이 하는 장례식이 이상했다. 그래도 그들이 아니면 할머니 상을 치를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었다. 숟갈 몽당이 하나 없는 변변찮은 산중 움막 살림에 할머니의 장례를 제대로 모실 수 없었기에 입었던 옷 그대로 멍석 관에 토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즈음부터 풍원이 어머니는 천주학을 믿기 시작했던 것 같다. 식전에 나가 종일 일을 하고 저녁에 들어오면 녹초가 되어 그대로 방바닥에 쓰러지던 어머니가 매일 밤 이슥해서야 움막으로 돌아왔다. 그런데도 피곤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어머니 얼굴에는 예전과 달리 생기가 돌았다. 매일같이 달고 살던 한숨도 사라지자 풍원이도 덩달아 신이 났다. 사는 것은 조금도 나아지는 것 없이 그날이 그날이었지만, 마음이 편안하니 어린 마음에도 무슨 일이든 하면 될 성싶었다.

“어머니, 저도 나무를 해다 팔아볼래요.”

풍원이는 의욕이 넘쳤다.

“아서라, 어린 게 무슨 장사를 한다고?”

“그래도 한번 해볼래요!”

깊은 산중이라 나무는 지천이었고, 밑천을 들이지 않고 어린 풍원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무장사뿐이었다. 수리골에서 시오리 떨어진 산 아래에는 고사리라는 마을이 있었다. 이곳은 일백여 호의 민가들과 주막집들이 즐비했고, 매일처럼 북적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부산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 중 조선에서는 가장 큰 영남대로가 지나는 길목이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새재를 넘어야 했다. 이런 새재 바로 아래 목을 차지한 곳이 안보역과 신풍역이 있는 고사리였다. 연풍처럼 관아가 있거나 향시가 서지는 않았지만, 이곳은 충주나 조령관, 그리고 연풍 읍내로 가는 갈림길이 시작되는 초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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