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잃은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골짝을 개간해 다랑이 논과 화전을 일궈 근근이 입에 풀칠을 했고, 봄이면 아낙들은 산자락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산나물을 뜯어다 양식을 대신하거나 장에 내다가 팔기도 했다. 손재주가 있는 사람들은 버들가지나 싸리나무를 베어다 싸릿개비로 갖가지 생활용품을 만들어 장에 내다 팔아 끼니를 연명했다.

이들뿐만 아니라, 마골산 수리골에는 박해를 피해 도망친 많은 천주교인이 옹기와 숯을 구우며 숨어 살고 있었다. 수리골 뿐 아니라 이곳 일대가 천주교인들의 근거지가 된 것도 수십 년이 넘었다. 고사리라고도 부르는 이 지역은 한양은 물론 영남에서 기호지방으로, 강원도의 관서나 관동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충청도의 내륙관문이었다. 천주교가 이 땅에 들어왔던 초기부터 교인들은 관헌들의 눈을 피해 새재를 넘어 경상도와 충청도, 경기도를 넘나들며 포교를 했다. 때로는 산줄기를 타고 곧바로 강원도로 가기도 했다. 연풍 인근에 교인들이 많은 이유는 교난을 당했을 때 어느 쪽으로든 재빨리 몸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연풍 인근은 관헌들에게 쫓겨 죄인이 된 백성이나 천주교인들에게는 사방팔방으로 도망갈 수 있는 좋은 피난처였다. 아무리 기약 없이 쫓기는 신세들이었지만, 이들도 먹고살기 위해서는 생필품을 구할 수 있는 향시가 필요했다. 그 향시가 이틀과 이렛날에 열리는 연풍장이었다. 아무리 위험해도 먹고살려면 저자로 내려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풍관아에서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신분을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닐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장날이 되면 관헌들은 교인들을 잡아내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다.

연풍 주막집에서 수리골로 숨어들었던 그해 겨울, 풍원이네 가족들의 생활은 짐승보다 나을 것이 조금도 없었다. 누군가가 버리고 간 움막을 주위 사람들이 손을 봐주어 그런대로 찬바람은 막을 수 있었지만, 불기운만 떨어지면 금방 냉랭해지는 웃풍과 얼음장같은 구들에 덮을 이부자리도 없이 겨울을 나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삿자리를 깔고 솔가리를 이불 삼아 네 식구가 산짐승처럼 웅크리고 붙어서 길기만 한 겨울을 견뎌내야 했다. 워낙에 추위에 떨었던지라 날씨만 푹하면 열흘을 굶어도 살 것만 같았다. 살아서 봄을 맞이한 것만 해도 천운이었다. 그러나 봄은 왔어도 살기가 고통스러운 것은 여전했다. 지닌 것 하나 없이 알몸으로 산중으로 들어왔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낱알 한 톨 섞이지 않은 전다지 나물죽으로만 끼니를 때우다 보니 식구들은 부황이 들어 온몸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먹는 것도 부실한데다,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화전까지 일궈야하니 산중 생활의 고통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종일을 쉴 새 없이 꿈지럭거려도 네 식구 끼니도 해결되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이래 살아야 하누.”

풍원이 어머니는 화전떼기 두둑에 걸터앉아 가슴으로부터 올라오는 깊은 한숨을 내뱉곤 했다. 건장한 남정네가 집안에 버티고 있어도 식구들 입조차 그슬리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런데, 이런 산중에서 아낙의 몸으로 정신이 들락날락하는 시어머니와 어린 자식들을 건사하는 것이 그믐밤 산길을 걷는 만큼이나 막막했을 것은 삼척동자도 알만한 일이었다. 더구나 풍원의 어머니는 친정에서나 시집을 와서나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살아온 아낙이었다. 그렇게 편안하게 살아온 어머니가 수리골에서의 모질고 거친 생활을 감당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풍원이 어머니는 매일같이 초죽음이 되어 움막으로 돌아왔다. 그런데다 할머니마저 어머니만 보면 잡아먹을 듯 달려들었다.

“이 여시년! 신랑 잡어먹구, 시아부지 잡어먹구, 누굴 또 잡어먹을라구 상구 안 가구 이 집에 있는겨? 이년, 당장 나가거라!”

해거름이 되어서야 움막으로 돌아오는 어머니를 보기만 하면 할머니는 눈에 불똥을 튀기며 포악질을 했다. 할머니는 나물죽만 먹어도 발광이 날 때는 힘이 항우장사였다. 더구나 깊은 산중이었으니 누구 한 사람 할머니를 말려줄 이가 없었다. 그러니 할머니의 발광 기운이 잦아들 때까지 어머니는 머리채를 내놓은 채 고스라니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풍원아, 어린 니들을 생각하면 벼락 맞을 소리다만 엄만 너무 힘들어 못 살겠다. 할 수만 있다면 그만 죽고 싶구나.”

풍원의 어머니는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불행은 쌍으로 온다더니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고 수리골로 들어왔던 첫해 봄 하마터면 누이동생 보연이를 잃을 뻔한 일이 생겼다. 그리고 그 일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날도 할머니와 보연이를 움막에 남겨두고 풍원이와 어머니는 화전을 일구러 갔었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