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식구가 많아서…….”

이제껏 아버지 그늘 밑에서 세상 물정이라고는 전혀 모르며 살아온 풍원이 어머니가 집밖에서 할 일은 별로 없었다. 더구나 집안일도 아니고 남정네들이 득실거리는 주막집에서 온갖 사람들의 입맛과 비위를 맞추어야 하는 일이었다. 어머니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연유는 알 수 없어도, 보아하니 내당에서 포스랍게 지낸 안댁 같구만, 하지만 이깟 일 하자고 들면 못할 게 뭐 있겄수? 그닥 손님이 많지 않은 여느 겨울 같으면 나 혼자 그럭저럭 꾸려나가겠는데, 이번 겨울에는 문경에서 충주로 넘어가는 세곡을 옮기는 담꾼들이 많아 벅차구먼. 안늙으신네하고 애들도 바쁠 때 잔일이라도 거들어주고 하면 밥이야 못 먹여주겄수?”

주모가 풍원이 어머니를 붙잡아놓기 위해 후하게 말했다.

풍원이 어머니는 새재를 넘어 아무도 자신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곳으로 가려고 했다. 몸을 보호하려면 일단 어디로든 멀리 떠나야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늙은 시어머니와 어린 남매를 데리고 한겨울에 험준한 새재를 넘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라고 말리는 주모의 만류에 연풍 주막집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못이기는 척 주저앉았다. 하기야, 이런 힘든 시절에 허드렛일을 해주고 식구들 입만 해결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풍원의 가족에게는 주모가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그해 겨울, 풍원이네 가족이 고향인 도화동을 떠나 처음 머문 곳은 향시가 열리는 연풍 저자 주막집이었다. 연풍에는 주막집이 여러 곳 있었지만 어느 집이라 할 것 없이 북적거렸다. 물길이 얼어 뱃길이 끊기는 청풍과는 달리 한겨울에도 나그네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것은 한양으로 통하는 영남대로가 연풍을 지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길로는 나랏일로 오가는 수많은 관인들과 이들을 따라다니는 노복들, 각지를 돌아다니는 많은 장사꾼들과 이들의 물건을 나르는 담꾼들, 이들 사이에서 물건을 흥정하여 매매를 성사시키려는 거간꾼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니 눈이 첩첩이 내려 고갯길이 막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겨우내 사람들이 고개를 넘나들었다. 당연지사 주막집도 한가할 날이 없었다. 주막집에는 하루 종일 사람들이 들락거리며 술판이 벌어지고, 팔도에서 벌어지는 온갖 이야기들을 앉아서 들을 수 있었다.

“담, 장날에 관아에서 흑정들을 심판한다는구먼.”

연풍에서 장이 열리던 날 요기를 하러 주막에 왔던 장꾼이 말했다.

흑정은 옹기를 굽는 천주교인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짐승을 도살하는 백정을 천대시하는 것처럼 옹기장이들을 멸시하여 사람들이 부르는 말이었다.

“그놈들은 솎아도 뽑아내도 어째 지칭개처럼 질기게 자꾸 나온디야?”

“서양 귀신에 한번 빠지면 아편보다도 끊기 힘들다고 하나 깜짝 않고 염불을 외운다니 그게 워디 사람이여.”

“흑정놈들 뿐만 아니라 한양에서 죄를 짓고 영남으로 도망치려다 관문에서 잡힌 괴수도 함께 죽일 모양이던데.”

“이번에 잡힌 괴수 놈은 한양 시전 바닥에서 백주에 객주를 난도질한 흉악한 놈이라는구먼.”

“괴수는 무슨 괴수여, 남의 물건을 도적질했어야 괴수지. 백성에게 나눠줄 물건을 통 째로 가로채 팔아먹은 객주 놈 목줄을 땄다는데 그게 괴수여 의적이지. 암, 의적이고말고!”

“그래도 사람 죽인 놈을 의적이라 하는 것은 도가 지나친 것 아닌감?”

“사람도 사람 나름이지. 이놈의 세상엔 외려 짐승만도 못한 씨알머리가 숱해.”

“그게 뭔 소리여?”

“굶어 죽는 백성을 구제하라고 진휼청에서 내린 환곡을 관리와 시전 객주가 짜고 빼돌려 착복했다니 그게 사람이여? 개도 지 새끼 밥그릇은 넘보지 않는다는데, 백성 목숨줄이 달린 구휼미를 관리와 객주가 작당해 꿀꺽 하다니 그걸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냐? 인두껍이지.”

“세상에서 젤로 드러운 놈이 남 밥그릇 뺏는 놈이여!”

“그 관리 놈도 개 잡듯 각을 떠버리지, 왜 객주만 죽였디야?”

“관리가 다치는 것 봤어? 객주가 다 뒤집어썼겠지.”

“관리가 뒷구멍으로 해먹지, 내놓고 앞으로 해먹는 것 봤냐?”

“아랫것들 앞장세우고 뒷구멍으로 해쳐먹으니, 맨날 뒈지는 것은 힘 없는 잔챙이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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