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의 대를 이을 유일한 핏줄인 풍원이가 목숨을 건진 것만 해도 천운이었다. 본래 역적의 자손은 삼대를 멸하고, 그 가솔들은 노비로 삼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 처지에 목숨을 부지하게 된 것은 몰수된 전답 외에도 소작민들의 등골을 빼 뒤주 속에 가득 쟁여두었던 금붙이와 돈을 목사에게 바쳤기 때문이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역적으로 몰려 목숨을 부지하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나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아버지와 재산을 잃고 바람벽이 없어진 풍원이네 가족은 동짓달 강바람보다도 훨씬 더 매서운 마을 사람들의 질시에 찬 눈초리를 온몸으로 견뎌내야만 했다. 예전 같으면 감히 그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몸을 조아리던 사람들도 풍원이네 가족들을 멸시하고 조롱하며 대거리했다. 고향에서 사람들의 사나운 눈총을 받으며 살 수는 없었다. 역적으로부터 목숨은 구했지만 원성을 산 사람들에게 언제 어느 순간 해코지를 당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일단 몸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고향인 도화동을 떠나야만 했다. 강물이 꽝꽝 얼어붙은 그해 한겨울 어느 날 풍원이네 가족들은 고향을 떠났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누이동생 보연이와 함께였다. 그때가 풍원이의 나이 열 살, 보연이는 여덟 살이었다. 떡국재를 넘어 수산 서곡으로 가는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보이는 도화동 앞 강줄기가 실처럼 아스라하게 펼쳐졌다. 고향 마을 뒤로는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금수산이 눈을 머리에 뒤집어 쓴 채 눈이 시리도록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한동안 어머니는 고갯마루에서 도화동을 바라다보며 자꾸만 눈물을 훔쳤다.

“엄마, 어디로 가나요?”

찬바람이 몰아치는 고갯마루에서 볼이 발갛게 언 보연이가 물었다.

“글쎄다, 어디로 갈꼬, 어디로 갈꼬…….”

정해진 목적지도 없이, 수중에 지닌 변변한 패물도 없이 떠나는 어머니는 앞길이 막막해서 같은 말만 연거푸 되뇌였다. 어쨌든 고향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한 발짝이라도 멀리 떠나야만 했다.

수산을 거쳐 봉화재를 넘어 역이 있는 덕곡에 이르기까지 주변 마을은 생기 없이 음습하고, 사람들 표정은 하나같이 무겁고 어두웠다. 계절 탓만이 아니었다. 시절 탓이었다. 언제 주인을 잃은 지도 알 수 없는 집들의 마당에는 말라버린 검불이 스산하게 바람에 흔들리고, 거적으로 찬바람을 막고 있는 집, 벽이 허물어진 집들이 마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정처 없이 떠도는 유랑민들 떼거리도 길에서 심심찮게 지나쳤지만, 그들 또한 기갈에 시달려 낯빛은 죽을상이었고, 행색은 거지 중에 상거지 꼴이었다. 어린 풍원이의 생각에도 앞으로 가족들에게 닥칠 일이 그리 녹록치는 않을 것 같았다. 풍원이네 가족들이 폐가를 전전하며 송계를 거쳐 지릅재와 소조령을 넘어 며칠 만에 당도한 곳은 연풍이었다. 연풍도 청풍과 비슷한 규모의 현이었지만, 청풍과 달리 영남대로가 지나는 육로 교통의 요지였다. 백두대간의 산줄기가 노도처럼 뻗어 내리다 잠시 기세를 꺾고, 새가 알을 품는 둥지처럼 첩첩산중에 둘러싸여 안온하게 자리 잡은 연풍은 부산진에서 한양으로 연결되는 내륙의 관문이었다. 마을의 호수는 청풍에 비해 절반쯤 적었지만, 새재 넘어 도보로 영남과 한양을 오가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으므로 연풍은 청풍보다 훨씬 더 북적거렸다. 여기에서 고사리를 거쳐 험준한 삼십 리 새재를 넘으면 영남의 문경 땅이었다. 풍원이네 식구들은 될 수 있는 한 청풍에서 멀리 떨어져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영남으로 내려갈 작정이었다.

“새댁은 어디로 가는 게요?”

연풍에서 요기를 하려고 들어간 풍원이 어머니에게 주모가 행로를 물었다.

“영남으로 가려고 하오.”

“저 어린 것들하고 늙으신네를 델구 새댁 혼자? 더구나 이 엄동에?”

주모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시오?”

“그런 행색으로 저 험한 재를 넘다가는 지금 같은 한겨울에 굶어 죽거나 얼어 죽거나 둘 중 하나요.”

“그러니 어쩌우?”

“말투를 보니 딱히 갈 곳이 정해진 것도 아닌 것 같은데…….”

“…….”

풍원이 어머니가 주모의 쪽집게 눈썰미에 대답을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우리 집에 있던 찬모가 도부꾼하고 눈이 맞아 야반도주를 하고 나 혼자 동동거리던 참인데, 마침 잘 되었구려. 나 좀 도와주다 겨울이나 지나고 떠나면 안 되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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