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청주민예총 사무국장

얼마 전 ‘도깨비’란 드라마가 종영됐다. 케이블TV 최고 시청률을 자랑하며 전국에 도깨비 신드롬을 만들었다. 드라마는 끝났지만, 도깨비는 여전히 존재한다. 드라마 주인공처럼 롱코트를 입고 중절모자를 쓰고 세상 누구보다 멋지고 폼 나게 걸어보는 일, 또는 전생의 사랑을 만나는 일, 또는 죽음이 드라마처럼 아름다울 수 있다면 두려움을 이기고 장엄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일. 그러니 나는 여전히 도깨비앓이 중이다. 

죽음만큼 두려움이 크거나 경험치가 없는 것도 없다. 먼저 죽어 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볼 수도 없고 과학적으로 풀 방법도 없다. 그저 사후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여러 종교에 의해 전해질 뿐이다. 이를 믿는 사람도 많다.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믿어라 믿으면 천국에 갈 것이다. 이 얼마나 이기적인가. 과연 천국은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지옥은 어디에 존재할까. 

주인공 도깨비는 신에 의해 영생불멸의 삶을 얻었다. 그러나 도깨비는 아픈 전생을 온전히 기억하고 있으며 수많은 세월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지켜봐야 한다. 반면, 저승사자는 전생의 기억을 잊은 채 죽은 자의 기억을 지워주고 사후 세계로 인도한다. 전생을 기억하며 영원한 삶을 사는 도깨비와 전생을 모두 잊은 채 살아가는 저승사자, 신은 둘 중 누구에게 벌을 내린 것일까.

나는 좁고 어두운 곳이나 높은 곳을 싫어한다. 처음 영화관에 갔을 때 만약 불이 난다면 어떻게 될까. 어둡고 좁은 통로를 찾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하는 고민이 들었다. 비행기를 타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몇 해 전 중국에 갈 일이 있었는데 비행기를 타기도 전에 두려움이 앞섰다. 나로서는 큰 용기를 낸 셈이다. 안락한 비행기 안에서도 초조하기는 마찬가지였고 도착해서는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걱정이 앞섰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노력으로 극복되지 않는다. 땅이나 물에 붙어 있는 차나 배는 이런 두려움이 없다. 어떤 사고이건 죽는 건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나의 죽음을 생각해 봤을 것이다. 나를 포함해 대부분 사람은 무로 돌아간다고 생각할 것이다. 죽으면 그만이지 무엇이 있겠는가. 오죽하면 ‘죽으면 그만인 것을 아등바등 살아봐야 무엇하나’라는 말이 있을까. 그러나 인간은 죽기 살기로 살아간다. 미워하고 증오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신은 어찌하여 사랑과 증오 두 가지 모두를 인간에게 주었을까. 전생에 자신의 가슴에 칼을 꽂은 저승사자를 만난 도깨비는 결국 그를 용서한다. 그리고 900년의 세월을 지나 만난 도깨비 신부를 위해 기꺼이 무로 돌아간다. 죽어야 사랑을 지킬 수 있는 도깨비와 자신의 손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죽여야 하는 도깨비 신부의 비극적 사랑은 전생과 죽음, 그리고 환생의 삶을 거쳐 이뤄진다. 끝내 죽음이 사랑을 이기지 못했다.

그렇다면, 나는 마지막 순간 무엇을 위해 죽어야 할까. 생물학적 삶이 끝남으로써 생을 마감해야 한다는 것만큼 슬픈 것도 없을 것이다. 아름답게 죽는 것은 무엇일까. 현재 나는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있을까. 긴 겨울 지나 봄이 오면 꽃피고 단풍드는 자연의 섭리처럼 현재 나의 글과 정신과 사랑과 증오의 마음도 꽃피고 단풍들어 온전한 죽음으로 갈 수 있을까. 그때 나는 최후의 문장을 나의 사랑에게 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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