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년이 계속되자 조정에서는 백성들의 고충을 덜어주겠다며 세곡을 화폐로 징수한다고 발표했다. 계속되는 흉년으로 핍박해진 백성들을 구휼한다는 탕감책이 그 꼴이었다. 당장 식구들 먹을 양식도 없는 판국에 장에 내다 팔 곡식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다고 세금을 내지 않고는 아전들의 등살에 배겨날 수가 없었다. 아전들의 학정을 면하고 고향에서 살기 위해서는 베를 짜 장마당에 내놓아 돈을 사는 길뿐이었다. 그러니 아녀자들은 낮에는 밭일로 밤에는 베 짜기로 이중 삼중의 고통이 가중되었다. 가뜩이나 굶주린 아녀자들은 세금을 바치기 위해 베틀에 머리를 찧어가며 밤새 베를 짜야 했다. 돈이 있는 사람이야 문제가 없었지만, 돈이 없는 백성은 어차피 무명을 장에 내다 팔아야 돈을 만들 수 있었다. 당장 먹을거리가 없어 하루하루가 석삼년 같은 궁핍한 처지에 곡식이나 베를 모아놓을 여력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다 보니 세금을 내기 위해 저마다 가지고 나온 백성들 무명이 장에 몰렸고, 값은 곤두박질을 쳤다. 한 필 반만 내면 되던 세금이 엽전 가치가 치솟아 세 필이나 네 필은 팔아야 세금을 낼 수 있었으니 백성들로서는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그 와중에도 고리채업자나 돈을 가진 장사꾼들은 돈의 가치를 높이려고 움켜쥔 채 내놓지를 않았다. 이래저래 등골 휘는 놈은 가진 것 없는 백성들뿐이었다. 나랏님은 배려한다고 하는 처사가 오히려 백성들에게는 고통을 보태주는 결과만 낳았다. 백성들 실정은 눈곱만큼도 모르는 배부른 관리들의 소치였다.

“항아리 주둥이에 거미줄 친 지가 언젠데 뭐로 돈을 만든단 말이여!”

“호구도 해결 못하는 처지에 세금을 내라니, 도대체 나랏님은 백성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기나 하는 거여, 뭐여!”

“야반도주라도 해야지 더 이상 못 살겠구먼!”

“니 놈 생각만 하냐? 니 놈이 도망가면 남은 사람들이 니 빚까지 떠안아야 하는 걸 모른단 말이냐?”

“오죽하면 그런 말을 하겄느냐?”

“앉지도 서지도 못하게 백성들을 옥죄니 지랄할 놈의 세상 아니냐?”

“지랄 같은 세상이여!”

도화동에도 쌓여만 가는 빚을 감당할 수 없어 대대로 뿌리를 내리고 살아오던 사람들이 잇따라 고향을 떠나는 바람에 자고 일어나면 빈집들이 하나?둘씩 늘어만 갔다. 고을민들이 땅을 버리고 유리걸식을 하느라 사방에 거지떼가 득실거려도 관아의 부사나 아전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중앙의 관료나 지방의 관리나 모두 한통속이었다. 그러자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힘겨운 현실을 잊으려는 온갖 비기와 참설이 난무하여 세상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런 때 관아정문인 금남루에 외척 세도가의 부패와 타락, 탐관오리들의 잔혹한 행위를 규탄하는 괘서가 붙었으니 청풍관아가 발칵 뒤집혔다. 조정에서는 충주목사를 청풍에 급히 파송하고 범인 색출에 들어갔다. 의심이 가는 자들을 모두 잡아들여 일일이 조사한 결과 괘서를 쓴 장본인은 정 진사의 둘째아들 정덕헌으로 밝혀졌다.

인근에서는 교리댁으로 불리던 도화동 정씨 권문은 뿌리 깊은 사대부 집안이었다. 본디 이곳 도화동이 정씨 가의 본향은 아니었다. 정씨의 본향은 경상도 영일이었다. 그러다 고려 말, 만고충신 포은께서 개성 선죽교에서 순절한 후 개성 땅 풍덕에 모셔져 있었는 데 조선 태종 때 고향으로 천장하던 중 용인의 모현 땅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돌풍이 불며 명정이 날아가 지금의 묏자리에 떨어졌다고 한다. 이후 일가들이 모현촌에 터를 잡고 살았다. 정덕현의 중시조인 팔자 현자는 임진란으로 부모님을 모두 잃고 어린 나이에 천애고아가 된 후 모현촌 일가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약관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 진사를 거쳐 벼슬길로 나아갔다. 이후 폐왕 광해조에 이르러 홍문관 교리로 문장이 뛰어나 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광해 임금이 실심하여 패륜을 거듭하자 상소를 올리고 모현촌 선영 아래 종가에 머물며 후학들에게 유학을 강론했다. 그러다 중시조가 지금의 도화동에 터전을 잡으신 것은 그 분의 지극한 효심에서 기인했다. 팔현의 선친께서는 임진왜란 때 포항 병마절도사로 임직 중 순절하여 죽령 너머 안동의 유택에 잠들어 있었다. 가을이 되어 낙엽이 떨어져 뿌리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 부모님 생각이 떠올라 팔현 중시조는 용인의 모현 땅에서 친산까지 그 먼거리를 성묘를 다녔다. 그러나 용인과 안동과는 길이 멀고 험하므로 조금이라도 가까이에서 친산을 보살피기 위해 낙향하여 새로이 세거지를 튼 곳이 청풍 땅 도화동이었다. 이후 누대를 걸쳐 이곳에 뿌리를 내리며 살아왔으니 정씨 권문 후손들로서는 도화동이 고향이나 진배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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