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숙 수필가

겨울밤 10시 30분. 한적한 도로 위에 10여 대의 차량이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며 정지해 있었다. 차창 밖에는 보름을 맞은 달이 적막하게 떠 있었다. 먼 길을 달려온 나는 졸음을 쫓으려고 유리문을 살짝 내렸다.

갑자기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이 야심한 밤에 음악을 이렇게 크게 틀었을까? 돌아보니 바로 옆 차선에서 나는 소리였다. 아! 그러나 그것은 오디오 소리가 아니었다. 자그마한 다마스 차종의 운전자가 창문을 내리고 아리아를 부르고 있었다!

졸음이 확 달아났다. 나도 모르게 유리문을 활짝 내렸다. 자동차를 가깝게 이동했다. 그는 조그맣게 배경음악을 틀어놓고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의 아리아 중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부르고 있었다.

밤하늘에 메아리치는 낭랑한 아리아! 그는 마치 큰 무대에라도 선 듯 혼신을 다해 노래하고 있었다. 그 청아하면서도 울림이 깊은 음색이라니!

Nessun dorma!

Nessun dorma!

Tu pure, o Principessa,

Nella tua fredda stanza,

Guardi le stelle che tremano d’amore

E di speranza.

Ma il mio mistero e chiuso in me

Il nome mio nessun sapra, no, no,

Sulla tua bocca lo diro

Quando la luce splendera!

Ed il mio bacio sciogliera il silenzio che ti fa mia!

Dilegua, o notte, tramontate stelle!

All’alba vincero, vincero!

(아무도 잠들지 말라!/ 아무도 잠들지 말라!/ 공주, 그대 역시/ 그대의 차가운 방에서/사랑의 희망에 떨고 있는/ 저 별을 보는구나./ 그러나 나의 비밀은 내게 있으니/ 내 이름은 아무도 알 수 없으리/ 아니, 빛이 퍼져갈 때/ 내가 그대의 입에 말하리라./ 그리고 침묵을 깨는 입맞춤이 그대를 나의 것으로 만들지니/ 밤이여 밝아오라, 별이여 사라져라!/ 나의 승리여, 승리여!)

가슴이 너무 뛰어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주위의 소음이 일순 멈춘 듯했다. 어느새 다른 차들의 창문도 내려져 있었다. 이 밤, 우리는 무슨 인연으로 이 길에 멈춰 서서 그의 노래를 듣게 된 것일까! 깜짝 관객이 된 그들과 나는 감동의 눈길을 서로 나누었다.

살짝 엿보니 노래를 부르고 있는 주인공은 갈색 작업복을 입은 곱슬머리의 젊은이였다. ‘00 인테리어 디자인’이라고 크게 써 붙인 차를 운전하고 있는 청년, 혹시 오페라 가수 지망생이 아닐까? 그는 이 어둠을 무대로, 우리를 관객 삼아 즉석 연주회를 열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짧은 정차시간까지 아껴가며 짬짬이 연마하고 있는 그는 미미하게나마 이렇게라도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었던 것일까? 뜬금없이 가슴이 짠해졌다. 왜 하필이면 ‘공주는 잠 못 이루고’인가. 어쩌면 그도 폴 포츠(Paul Potts)와 같은 성공을 꿈꾸고 있는 것일까?

2007년 6월 17일 ‘브리튼즈 갓 탤런트(Britain’s Got Talent)’대회에 출연했던 폴 포츠. 37세의 그는 당시 휴대전화 판매원이었다.

무대에 선 폴 포츠는 허름한 정장에 불룩하게 튀어나온 배, 부러진 앞니, 자신감 없어 보이는 표정과 어눌한 말투, 잔뜩 긴장해 뻣뻣하게 경직된 모습이었다. 그런 그에게서 흘러나온 청아한 음색과 열정적인 노래는 전혀 예상치 못한 감동을 주었다. 관객들과 심사위원들은 일제히 환호와 기립박수로 찬사를 보냈다.

그때 부른 노래가 바로 <공주는 잠 못 이루고>이다. 나도 인터넷을 통해 그 영상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봤다. 외모와 전혀 매치가 안 되는 그 아름다운 울림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찡해지곤 했었다. 전 세계 누리꾼들의 폭발적인 감동의 물결 속에 그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오페라 가수가 됐다. 많은 음반을 낸 것은 물론, 그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제작되었고, 책도 출간되었다.

폴 포츠는 이제 전 세계로 초청 공연을 다니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를 참 좋아한다고 했다. 여러 번 내한공연을 했으며, 드라마 ‘선덕여왕’의 OST에도 참여하고, 각종 음악프로그램과 행사에 초대되는 등 지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는 인생역전의 대명사가 되었다.

세상에는 폴 포츠 보다 잘 생기고 노래 잘하는 가수들이 많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그에게 그토록 열광하는 것일까? 그건 ‘꿈’에 대한 그의 열정 때문일 것이다.

못생긴 외모 탓에 왕따가 되었고, 교통사고, 종양 수술, 오페라 회사들의 문전 박대 등 수많은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노래를 포기하지 않았던 그는 ‘언젠가는 나에게도 절호의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일하는 짬짬이 독학으로 노래 연습을 했단다. 이 노력파에게 쏟아진 행운은 결코 우연이 아닌 듯했다.

우리나라에도 폴 포츠 붐을 타고 인생역전을 꿈꾸게 하는 TV 프로그램들이 제작되고 있다. M net의 ‘슈퍼스타K’, SBS의 ‘K팝스타’등 신인 발굴 프로그램이 양산되었고, 일반인들의 참여도나 시청률도 높다고 한다.

세계적인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도 전직이 트럭 기사였다. 잠시 극적인 상상을 해본다. 트럭과 다마스, 엘비스와 청년, 그리고 폴 포츠. 어쩌면 TV를 통해 이 젊은이를 다시 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를 대비해 그의 곱슬머리를 꼭 기억해 두리라.

신호등이 좌회전을 알리는 초록빛 화살표로 바뀌자 관객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차가운 바람에 몸을 떨면서도 창문을 올리지 못했다. 그의 노랫소리가 허공에 나부끼며 오래도록 내 귀를 붙잡고 있었다. 얼음공주를 녹였던 그 아리아는 내 가슴까지 녹이고 있었다.

새해 벽두에 찾아온 이 감미로운 운율은 또 하나의 시작을 알리는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문득 운명론의 감옥에 갇혀 있던 나를 되돌아보았다. 젊은 날 밤새 일기장을 빼곡히 메웠던 그 찬란했던 미래는 다 어디로 갔을까? 나는 그것들을 이루기 위해 과연 무엇을 했던가.

사람은 꿈을 먹고 산다고 했다. 기회와 행운은 활짝 가슴을 열고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나도 제대로 한 번 꿈을 꾸어 본 적이 있었을까. 허나 꿈을 이루기 위해 저토록 치열한 그들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에게도 새로운 희망을 품을 기회가 아직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그 밤 나는 오페라의 ‘공주’처럼 잠 못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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