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행정가로 살아온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결국 거칠고 험한 정치판의 벽을 넘지 못했다. 반 전 총장이 1일 오후 국회 정론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반 전 총장은 기자들 앞에서 한 장 분량의 불출마 선언서를 읽어 내려갔다. 반 전 총장은 귀국 후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데 미력하게나마 몸을 던지겠다는 일념에서 정치에 투신할 것을 심각하게 고려해 왔다. 순수한 포부를 인격살해에 가까운 음해, 각종 정치교체의 명분은 실종되면서 저 개인과 가족 그리고 제가 10년을 봉직했던 유엔의 명예에 큰 상처만 남기게 됨으로써 결국은 국민들에게 큰 누를 끼치게 됐다”고 호소하면서 “정치인들의 구태의연하고 편협한 이기주의적 태도는 지극히 실망스러웠고, 결국 이들과 함께 길을 가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판단에 이르게 됐다”는 불출마 이유를 밝혔다.

그는 덧붙여 “10년 동안의 자산을 바탕으로 나라의 위기를 해결하고,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를 위해 어떤 방법이든 헌신하겠다”는 의지도 내비쳤다. 이로써 지난달 12일 귀국해 공항에서 분열된 국론을 모아 국민 대통합을 이루고 협치와 분권 등을 통해 정치교체를 이루겠다는 소신을 밝힌 그의 정치적 행보가 3주 만에 막을 내리게 됐다.

반 전 총장의 대선출마 포기는 그의 귀국 후 행보를 지켜보던 정치권에서는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다. 소위 정치9단이라는 박지원 국민의당 대표만 해도 반 전 총장이 귀국하기 전에는 당연히 영입 1호로 거론했으나 귀국 후 국민의 지지율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는 것을 감지한 후 ‘셔터를 내렸다’는 표현까지 써가며 냉정하게 돌아섰다. 바른정당 역시 유승민 남경필과의 공정한 경선을 내세우며 조건 없는 1순위 후보는 아니라는 입장을 피력했다. 어느 당으로 입당하든지 무조건 유일한 후보자가 될 수 없음을 방증해주는 이야기다.

반 전 총장으로서는 예기치 못한 벽에 부딪쳤다고 볼 수 있다. 설상가상으로 연일 실수로 국민들에게 실망을 주었고 박연차 리스트 파문, 조카 반기상씨의 구속과 기소, 동생의 미국법원의 체포요구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불거졌지만 이에 대한 뚜렷한 해명을 내놓지 않아 의혹을 키워 왔던 게 사실이다.  

반 전 총장의 이 같은 행보는 국민에 의해 선출되는 정치여정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우려가 있었고 우려가 현실이 된 셈이다. 설 명절을 기점으로 반 전 총장을 지지했던 민심이 급격히 돌아섰다.

반 전 총장이 정치판에 상존하는 파란만장한 변수를 예측했더라면, 일찌감치 대권도전을 접던지, 아니면 정치교체라는 자신이 던진 화두에 맞게 좀 더 지혜롭게 대처했더라면 더 좋았을 뻔 했다. 본인은 물론이고 국민이나, 유엔의 가족들 모두에게 큰 상처를 남긴 것은 사실이다. 처음부터 대권도전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유엔총장이라는 ‘큰 명예’를 지키는데 더 큰 의미를 부여 했더라면 국민과 세계가 실망하는 오늘 같은 날은 없었을 것이다. 스스로 명예를 지키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늦었지만 본인과 국가를 위해 바람직한 선택을 했다. 앞으로 10년 유엔총장 경험을 살려 그동안 성과를 내지 못한 남북문제 개선과 세계평화를 위해 허신하는 진정한 어른으로 남아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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