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번역가

춘추시대(春秋時代)는 기원전 770년에서 기원전 403년 사이의 중국 역사를 말한다. 명칭은 공자가 지은 춘추(春秋)에서 유래하였다. 이 시기의 특징이라고 하면 강한 나라는 국론이 일치하였고, 항상 앞으로 닥칠 위기에 충실히 대비하였다. 반면에 망한 나라는 제각각 살기에 바빴고, 위기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었다.

기원전 574년 본래 진(晉)나라는 중원의 패권을 다툴 정도로 강대국이었다. 하지만 여공(勵公)이 왕위에 오르면서 국력이 급속히 약해졌다. 그는 향락에 눈이 멀어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로 인해 나라가 어지러워졌고 지방의 제후들은 등을 돌려 초나라를 섬기게 되었다. 신하들은 이러다가 나라가 망하고 말 것이라고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런 와중에 정변이 일어났다. 반란의 주모자들은 여공을 죽이고 새로이 도공(悼公)을 왕위에 세웠다.

도공은 제법 정신이 온전한 왕이었다. 신하들과 합심하여 국력신장에 힘을 쏟았다. 군대를 양성하였고 백성들의 경제를 보살폈다. 그러자 얼마 후에 초나라와 맞설 정도의 국력이 되었다. 하지만 그 무렵 진나라는 또 다른 고민에 빠져야 했다. 북방 오랑캐인 융적(戎狄)이 자주 국경을 쳐들어와 진나라를 괴롭혔던 것이다. 이에 도공이 중대결정을 내렸다.

“지금 당장 군대를 출정하여 융적을 토벌하라. 다시는 우리나라를 넘보지 못하도록 철저히 분쇄하라!”

그러자 대신 위강(魏絳)이 나서며 강하게 반대하였다. “대왕이시여, 그래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 군대가 융적을 치러 출정에 나서면 그 순간 초나라가 우리의 빈틈을 치고 들어올 것입니다. 그럴 경우 무엇으로 그들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융적을 치기보다는 잘 달래어 서로 화친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소신에게 그 임무를 맡겨주신다면 책임지고 완수하겠습니다.”

도공이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그래서 위강을 융적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융적을 찾아간 위강은 유창한 언변으로 상호우호조약을 체결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로 인해 진나라는 초나라와 패권을 겨룰 수 있는 여유를 얻게 되었다.

두 나라가 세력이 팽팽한 가운데 이전까지 중립을 지켰던 정(鄭)나라가 초나라와 동맹을 맺으려 하였다. 진나라가 이를 가만두지 않았다.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가 단숨에 정나라를 굴복시켰다. 이로 인해 천하의 위세가 진나라에 모아지게 되었고 도공의 명성 또한 천하에 알려졌다. 도공은 이 모든 공로를 위강에게 돌렸다. 그리고 많은 예물을 주어 포상하였다. 이에 위강이 아뢰었다.

“저에게 공로가 있다고 하심은 지나친 말씀이십니다. 진나라가 강성한 까닭은 모두가 대왕의 은총이며 여러 대신과 장수들의 공로입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아무쪼록 대왕께서는 평안할 때 위기를 생각하시면 오늘의 이 즐거움을 언제까지고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사마천의 ‘사기세가’에 있는 기록이다. 이때 유래한 말이 안불망위(安不忘危)이다. 편안할 때에 위기를 잊지 말라는 뜻이다. 이는 나라나 개인이나 똑같이 적용되는 교훈이다. 군자는 태평할 때 위기를 잊지 않는다. 잘 나갈 때 망할 것을 잊지 않고, 일이 잘 풀릴 때 혼란을 잊지 않는다. 이렇게 해야 몸도 편하고 자신의 꿈도 이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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