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청주민예총 사무국장

시골 출신인 나는 유치원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교육의 시작은 당연히 초등학교부터 시작되는 줄 알았고 입학하기 전까지 이름도 쓰지 못했고 구구단도 외우지 못했다. 결과, 나머지 공부를 무던히도 했다. 시골 촌부의 아이들은 모두가 한결같았다. 그래서 나머지 공부가 외롭지 않았다.

현재는 어린이집에서부터 유치원까지의 과정이 자연스러워졌다. 의무사항이 아님에도 모든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닌다.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어린아이부터 이제 걸음마를 마친 아이까지 공공의 질서와 대인관계, 공교육의 첫출발을 경험하게 된다.

맞벌이하는 부부의 어쩔 수 없는 선택에서부터 무한경쟁시대에 뒤처지고 싶지 않은 부모의 마음 등 이유는 여러 경우다. 이제 한글과 숫자, 심지어 영어까지 유치원에서 다 배우는 세상이다. 아이 교육에 열성적인 가정은 영어유치원이다 뭐다 해서 대학등록금에 버금가는 돈을 지출하기도 한다.   

우리 부모님 세대까지 거슬러 오르지 않아도 유치원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먹고 살기도 빠듯한 삶 속에 우리 부모들은 초등학교도 겨우 나오거나 아예 학교 문 앞에도 못 가본 경우가 대부분이다. 교육을 받지 못한 한이 대한민국의 교육열로 무한 경쟁의 입시제도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로지 자식의 교육과 자식의 자수성가만을 위해 살아온 부모들은 꼬부랑 할아버지, 할머니가 됐다. 부모를 모시고 사는 경우도 많지만, 자식에게 부담이 되고 싶지 않아 노부부가 떨어져 사는 가정이 대부분이다.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홀로 지내는 독거노인의 수도 적지 않다.

100세 시대에 발맞추어 최근 급부상하고 있는 산업이 노인요양과 관련한 부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외 한적한 곳에 자리한 요양원이 최근에는 도심 속 소규모 시설로 전환되고 있다. 교회만큼이나 쉽게 눈에 띈다. 

연로한 어머니를 오래 모셨던 지인이 있었다. 나중에는 근처 요양원에 어머니를 보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무척 괴로워했다. 오전에 모시고 가서 오후에 집으로 모시고 오는 시스템이었다. 낮 동안이지만 몸과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이다. 도심에 요양시설이 늘어나는 것은 지인과 같은 처지에 있는 가정이 늘어나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또는 자식들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요양시설을 찾는 이도 늘어나고 있다. 노후의 여가생활을 위해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노인대학이나 평생교육시설처럼 최근 요양시설은 의료시설의 개념에서 벗어난 문화와 교육이 어우러진 복지시스템으로 전환되고 있다. 아침에 등교해 저녁에 하교하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을 닮았다. 이도 건강한 몸이 뒤따라야 가능한 일이다.

도심에 우후죽순 늘어나고 있는 노인요양시설의 시스템이 어떤지는 알 수 없다. 비환경적이고 비인간적인 콘크리트 구조물에 갇힌 육신이 얼마나 평안하겠는가.

다만, 노인의 복지를 책임지는 시설이 단순 돈벌이가 아닌 우리 부모들을 위한 제대로 된 시설로 갖춰지길 바랄 뿐이다. 이 희망이 이뤄진다면, 나는 기꺼이 노년의 유치원에 다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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