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희 수필가

스님이 된 친구를 만나러 간다는 친구를 따라 절에 다녀왔다. 비구니 절 이라 그런지 어느 것 하나도 제멋대로 놓여있는 것이 없었다. 화장실이며, 화단, 사방을 둘러보아도 깨끗하고 단정하게 정돈된 절 뜨락에 가을볕이 한 번씩 추임새를 넣을 때마다 가을이 조금씩 물들어갔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다는 생각에 잠도 설쳤다는 스님의 이마 위에 여윈 햇살이 얄랑거렸다. 어느 날 갑자기 소식이 끊겼는데 스님이 되어 있더라는 그녀를 친구도 10여 년 만에 만나는 것이라고 했다. 스님은 애써 태연한 척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며 합장했다.

내 친구와 친구이니 나하고도 친구가 되지만 승복을 입은 그녀한테 감히 말 건네기가 쉽지 않았다. 가을에는 구수한 황차가 맛이 좋다면서 스님은 물을 끓여 물식힘 사발에 부었다. 소리 나지 않게 찻잔을 다루는 그녀의 단아한 몸짓과 섬세함이 한 눈에도 천생 여자 같았다. 스님이 따라주는 차를 입안에 궁굴리면서 오래전 내가 출가하던 때가 떠올랐다.

25년 전 나도 한 남자를 따라 출가했다. 태어나서 27년을 살던 집에 부모님과 동생들을 두고 홀연히 떠나오니 시누이가 세 명 있었다. 남편의 동생이니 손아래지만, 체격이 좋아 남편이 동생처럼 보였다. 옛날 어르신 같지 않게 시어머니도 키가 크셔 시댁 식구들 사이에 내가 끼이면 작은 내 몸집이 더 작아 보였다.

어머니한테 새 며느리를 들이는 일은 말 잘 듣는 세탁기를 들여 놓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느새 어머니의 부엌은 폐업 신고를 마친 것처럼 어지럽고 냉기가 돌았다. 그때부터 시나브로 수행이 시작되었다. 집안에 행사가 있거나 명절날이면 나 혼자만 바빴다. 시누들이나 어머니는 부엌 근처에 얼씬하지 않고, 집안일은 당연히 며느리인 내가 해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30년 가까이 다르게 살아온 낯선 집 주방에서 찬장을 뒤져가며 혼자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하다 보면, 방안에서 나는 웃음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시누들과 어머니가 이야기하며 웃는 웃음이 벽을 타고 주방으로 들어와 금세 음식 냄새와 섞였다. 남편도 한편이 되어 내 존재는 안중에도 없으니 처음 몇 년은 도무지 그런 분위기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해보지도 않던 큰일을 혼자서 하는 것만도 힘에 부치는데, 성이 다른 나만 외톨이가 되는 것 같은 소외감과 서운한 마음이 지친 몸을 더 고단하게 했다. 속상하고 서러운 생각이 들 때면 친정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누가 등 떠밀어 한 결혼은 아니었지만, 내가 이렇게 살려고 결혼했던가 싶어 자리를 박차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현실은 절박하고 미래는 언제나 불투명했다. 시어머니가 쓰러져 자리에 누워계실 때는 정말 아무런 기대도 할 수 없었다. 안개가 낀 것처럼 내 앞에 펼쳐지는 앞날이 마냥 부옇고 암담하기만 했다. 대, 소변 받아내고 밥 먹여 드리고 밤늦도록 이불 빨래하고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뜬 것 같은데 야속하게도 아침은 빨리 왔다.

고되고 힘들기는 스님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검정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장대비가 날카로운 철사처럼 마구 쏟아져 꽂히던 날, 무작정 집을 나섰는데 정신을 차리고 나니 절 방에 누워있더라고 했다. 마음속에 원망이 없어진 후에 결정하라는 스님의 말씀에 그녀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머리카락을 삭발했다.

그날부터 그녀의 시집살이가 시작되었다. 새벽 예불을 마치고 공양을 준비하고 동료 스님들의 빨래와 고무신까지 뽀얗게 닦으며 손등이 터지도록 일만 했다. 일에 묻혀 다른 생각은 할 여유조차 없었다. 종일 육신을 부리다 밤이 되면 피곤함에 절어 곯아떨어졌다.

속세를 떠나온 지 서너 달쯤 지났을 때 어떻게 알았는지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다. 삭발한 딸을 보고 그 자리에 무너앉던 어머니한테 그녀는 마음에도 없는 모진 소리를 해 돌려보냈다. 사사로운 정에 얽히면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아서였다. 괴괴한 절간에 딸 혼자 내버려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려 차마 발을 떼지 못하던 어머니의 뒷모습이 어른거려, 기나긴 밤을 뜬눈으로 새웠을 스님의 얼굴 위로 초라하기만 했던 내 모습이 겹쳐졌다.

스님은 인연을 맺는 것도 욕심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욕심과 원망을 버리고 자신을 내려놓으니 편안해지더라고 했다. 스님의 말처럼, 사람 사는 일도 마음먹기 나름인 것 같다. 결혼하고 줄곧 ‘내 집’, ‘네 집’하며 시댁과 친정을 철저하게 구분 짓던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수십 년 동안 굳어진 시댁식구와 남편의 사고가 바뀌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내가 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고 나니 한결 편안해지며 비로소 식구들이 가족처럼 눈에 들어왔다. 여자로서 며느리에게 마지막 자존심마저 보여야 하는 시어머님이 진심으로 안쓰러워지고, 시누이로밖에 안 보이던 남편의 여동생도 피붙이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명절만 되면 병이 나고 입술이 부르트던 것도 우리 식구가 먹을 음식을 장만한다고 생각하니 몸도 가뿐해졌다. 옛말에 ‘딸은 남의 집 식구다’고 하더니 꼭 나를 두고 한 말처럼 언제부턴가 시댁이 친정보다 더 편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내가 시댁 사람이 되기까지는 녹록하지 않았던 삶과 소태처럼 쓴 날들이 많았다. 시집와서 한동안은 시댁식구들과 융화하지 못해 구르는 돌처럼 모서리를 세우고 각지게 산 날들도 있었다. 차남이면서 장남 노릇을 해야만 하는 남편의 무거운 짐을 나누어지다 보니, 본의 아니게 식구들 앞에서 떨그럭거리는 소리도 자주 냈다. 더러는 원망과 욕심으로 뭉쳐진 마음의 결을 다스리지 못해 오래도록 가슴앓이를 하기도 했다.

10년 만에 친구를 만나 잠깐이지만 다시 여자로 돌아온 스님은 공유했던 추억을 끄집어낼 때마다 얼굴에 백일홍 꽃잎처럼 수줍게 물이 들었다. 가끔 행자 스님들 흉을 볼 때는 목젖이 보이도록 웃기도 했다. 추억이란 대체 무엇일까.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가졌기에 속세와 절교하고 삭발한 그녀의 마음조차 쥐고 흔드는 걸까.

친구 스님은 다시 주전자를 들고 빈 찻잔에 차를 따랐다. 쭈르르, 찻물 따르는 소리에 쌉싸래한 차 향기가 코끝에 와 닿는다. 스님이 따라 준 차 한 모금을 입에 물고 밖을 내다보니 댓돌 위에 놓여있는 하얀 남자 고무신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스님과 눈이 마주쳤다. 스님도 고무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이 민망했던지 스님은 “보기엔 투박해도 저 고무신이 참, 편해요.”라고 하며 수줍은 듯 얼굴이 발그스레해졌다. 스님의 짧은 한마디에 가슴 한편에서 뜨거운 무엇인가가 울컥하며 느꺼워졌다. 편안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만큼 절 생활이 익숙해졌다는 것일까. 스님은 한 남자와의 인연을 끊으려고 출가했고 나는 한 남자의 아내가 되려고 출가했지만, 어느새 우리는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가장 맛이 좋을 거라며 스님은 찻잔에 세 번째 우린 차를 따랐다. 쪼르르, 찻물 떨어지는 소리에 출가를 꿈꾸던 가을 햇볕이 슬그머니 달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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