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숙 수필가

면사무소에서 하나씩 나눠주는 달력은 소중한 살림살이였다.

거기에는 농사에 필요한 절기가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명절, 집안의 기일, 식구들 생일, 입학식, 졸업식 등 일 년의 행사들을 기록해 두는 용도로 쓰이기도 했다.

오일 장날을 따져 보거나 메주를 쑬 때도 장 담글 날을 잡을 때도 달력이 반드시 필요했다.

12월이 되면 이장이 집집마다 달력을 돌렸다. 새로 받은 달력에선 석유 냄새 비슷한 냄새가 났다. 그것은 마치 새해의 냄새처럼 생각되어 신선한 느낌마저 들었다. 달력이 걸려 있는 자리는 늘 같은 곳이었기에 달력을 떼어내고 보면 달력 뒤의 벽지는 누렇게 변한 다른 부분보다 눈에 띄게 깨끗했다. 기계충을 앓고 난 머슴애 머리통이 연상되었다.

서울서 직장을 다니던 오빠와 언니가 가져오는 달력에는 멋진 사진들이 들어 있었다. 종이도 면사무소에서 나눠 주는 것보다 훨씬 질이 좋았다.

날짜가 지난 달력은 맨 뒤로 넘겨져 자신의 소임을 끝냈다. 하지만 그것이 가장 귀하게 쓰여질 때는 달력으로서 쓰임을 끝낸 다음이었다.

겨울 방학식 때 받아온 새 학년 교과서는 설레임이었다. 아버지는 양력설이 지나면 우리들 교과서를 쌓아놓고 겉표지를 싸 주었다. 물론 다 새 교과서는 아니었다. 몇 권은 뒷집의 언니가 쓰던 것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그것들도 달력으로 깨끗이 겉표지를 싸 놓으면 겉으로 봐선 새 책이랑 구분이 안 갔다. 그렇게 말끔히 옷을 입은 교과서들은 방학 내내 가방 속에서 새 학기를 기다렸다.

시어머니는 명절 때 전을 부치면 소쿠리에 지나간 달력을 찢어서 깔았다. 키친타월도 있고 문방구에서 파는 전지도 있는데 꼭 헌 달력을 깔았다. 두툼한 달력은 기름을 잘 빨아들였다.

달력(calendar)이라는 말은 라틴어로 ‘흥미 있는 기록’ 또는 ‘회계장부’ 라는 뜻의 ‘칼린 다리움(calendarium)’ 에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고대 로마에서는 제관이 초승달을 보고 피리를 불어 월초임을 선포하였다고 하는데 이때 매월 초하루의 날짜를 ‘calend’라고 하였다. 조명이 좋지 못했던 당시의 밤길에는 초승달이 뜨는 것 보다 더 반가운 일이 없었기 때문에 초승을 중요한 기점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의 달력은 1582년경에 그 기초가 만들어졌으며, 당시 로마 교황인 그레고리의 이름을 따서 그레고리력이라고 불렀다. 태양력은 고대 이집트력, 고대 로마력, 율리우스력, 그레고리력으로 변천되어 왔다. 독재자로 잘 알려진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BC 100~44, 일명 시저)는 달력에도 큰 관심을 가져 BC 46년에 달력(1년, 365일)을 만들어 사용했는데, 이때의 로마력은 매우 불완전한 것이었다. 때마침 카이사르가 이집트를 원정했을 때 그 곳에서 사용하는 간편한 역법을 보고 카이사르는 자기 나름대로 역법을 개정해 나갔다. 이것이 율리우스력(the Julian calendar)이다. 율리우스력은 로마 제국 영토 내에서 널리 사용되었고, 전 유럽에 점차 보급되어 16세기 말까지 쓰이다가 그레고리력(Gregorian calendar)으로 이어졌다한다.

달과 태양과 지구와의 관계에서 탄생한 달력은 인간의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달력은 지침서와 다름없다. 나는 가끔 삶의 자세를 정비 하고플 때 그것을 들춰보는 버릇이 있다. 지나온 날과 앞으로의 날들에서 잊어야 할 것과 갖춰야 할 것의 목록을 결정하기도 한다.

핸드폰이 일상화 되면서 달력은 점점 자리를 잃어가게 되었다. 한때 흔하게 배포되던 달력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불경기 탓도 있겠지만 알람 설정에 메모 기능까지 갖춘 핸드폰이 달력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다. 하지만 핸드폰의 달력은 왠지 가벼운 느낌이다. 우주의 원리를 담고 있는 달력의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하고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안내자 일뿐이란 생각이 든다.

날짜 밑에 깨알 같은 글씨로 빼곡히 메모 되어 있던 달력에는 삶의 희로애락이 담겨져 있었다. 따뜻한 정과 사람 사는 냄새가 나고 이야기가 담겨져 있었다.

은행에 다니는 딸이 탁상용 달력 하나와 벽걸이용 달력 하나를 가져왔다. 벽에 못 박는 것이 싫어 걸지 않던 벽걸이 달력을 주방 한 켠에 걸었다. 탁상용 달력은 서재 책상위에 놓아두었다. 그리고는 식구들 생일을 먼저 표시했다. 1월 모임 약속과 여행계획, 집안 대소사를 메모했다.

새해를 담고 온 달력 속에 소중한 나의 일 년을 그려 넣었다. 정유년 한 해 따뜻한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