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충북작가회의 회장

아침부터 말 한마디 때문에 기분이 몹시 상했다. 물론 문제의 발단은 내게 있었다. 얼마 전 친구로부터 받은 그림 한 점을 표구사에 맡겼다. 그런데 보름도 훨씬 지났는데 연락이 없었다. 혹여 잊은 것은 아닌가 조바심이 들어 그림을 준 친구에게 표구사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전화를 걸어 표구사냐고 물었다. 순간 사과할 새도 없이 수화기 너머에서 ‘×발’하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친구가 번호를 잘못 알려준 것이었다.

상대방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사람의 행태에 열이 머리끝까지 뻗쳤다. 어떻게 생겨 처먹은 놈인지 당장 달려가 상판대기라도 확인하고 싶었다. 아니면 전화를 되걸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쌍소리를 퍼부어댈까도 했다. 그러다 욕할 만한 가치도 없는 천박한 놈이라고 단정을 지었다. 그래도 속에서는 부글부글 좀처럼 분이 삭혀지지 않았다.

꽤 오래전 일이다. 갓 스무 살을 넘었을 때이니 손가락을 서너 개쯤 꼽아야할 정도로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도 잊히지 않는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마구 살았다. 도무지 마음이 잡히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 그저 세상이 온통 분노덩어리로만 보였다. 매일처럼 술만 마시고 난장을 치고 다녔다. 보다 못한 어머니께서 다니시던 절집 스님에게 여쭈었는가보다. 스님께서는 ‘그 녀석은 평생 부모 속을 썩일게다’라고 하셨단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술을 잔뜩 퍼마시고 한밤중에 캄캄한 우암산을 넘어 절집으로 갔다. 주무시는 스님을 깨워 ‘당신처럼 중질 해먹으면 나도 하겠다’며 포악질을 해댔다. 그리고 스님 말씀이 틀리다는 것을 반드시 증명해보이겠다고 장담하며 내려왔다.    

이후 사소한 것이라도 사람들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거나 가슴 아프게 할 수 있는 말들을 의식적으로 피했다. 스님의 예지를 빗나가게 하기위해 기를 쓰고 언제나 내 욕구의 반대편으로 길을 택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봐도 스님의 말씀이 내게 독이 됐는지, 약이 됐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스님 말씀을 듣던 당시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어머니 생각을 하면 아직도 스님 말씀이 가슴 저리도록 아프다. 설령 스님 말씀으로 인해 내가 정신을 차렸다고 해도 나 때문에 가슴 아팠을 어머니를 떠올리면 스님께 서운하다. 스님께서는 그런 독설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그랬더라면 모두가 상처받는 일은 없었지 않았을까.

연못가에 서서 돌을 던지는 아이처럼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가 상대방에게는 아픔이 되어 평생 독약이 될 수도 있다. 또 어떤 말은 일생을 살아가며 바른길로 인도하는 길라잡이가 되어주기도 한다. 한 마디 말이 경우에 따라 독이 되기도 하고 약이 되기도 한다. 같은 값이면 상처가 되는 말 보다는 모두에게 약이 되는 그런 말이 좋지 않을까.

올해도 며칠 남지 않았다. 한 해를 뒤돌아보며 나는 올해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했는가, 혹여 상처를 남긴 말을 하지는 않았는지 조심스럽다. 남 탓만 하며 상대에게 가슴 아린 소리는 하지 않았는지 걱정이다. 평생 지침이 될 만한 말은 아니더라도, 한 순간만이라도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말이 많았기를 간절하게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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