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충북수필문학회장

복원이 끝난 부분의 중간쯤에는 전설을 담은 묘순이 바위가 있다. 성벽에서 커다란 바위가 밖으로 툭 튀어 나왔다. 성벽 속에 박혀 일부만 겉으로 드러냈다. 본래의 위치대로 복원한 것인지 복원하면서 묘순이 바위를 성벽 속으로 넣은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원형대로 복원했을 것이다.

힘센 남매인 묘순이와 길동이 중 누군가 하나는 죽어야 하는 비극적 사연이 담긴 묘순이 바위 이야기는 ‘오누이 힘겨루기 유형’의 전설이다. 이런 유형의 전설은 전국적으로 분포돼 있으며 청주지방의 구녀성에도 전해지고 있다. 이 전설은 옛사람들의 남아 선호사상을 짐작할 수 있는 한편 임존성 유래를 알 수도 있다.

묘순이 바위 부근에 백제 복국운동 기념비와 제단이 있다. 비문에는 복신, 도침, 흑치상지의 백제복국 저항 운동의 개요를 적었다. 임존성을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이라고는 했으나 최후의 비극을 가져온 주류성이라는 말은 없다. 또 주변에 주류성이라는 다른 성이 있다는 말도 없다. 도침과 복신, 복신과 부여풍의 비극적 이야기나 흑치상지의 패배와 배신의 삶의 내용도 감추어졌다. 이들이 나라를 부흥시키려했던 숭고한 구국정신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비를 세운다는 의도를 간략하게 적었다. 백제부흥운동 주역들 간의 갈등과 배신의 사실은 굳이 드러낼 일도 아니지만 감추어도 안 된다고 본다.

망루1에서 성벽은 동쪽으로 구부러진다. 돌 위에 눈이 쌓여 있다. 사람들이 아무도 없다. 북쪽에서 찬바람이 불어온다. 갑자기 등줄기에 소름이 쫙 끼치는 것을 느꼈다. 참나무 가지에 걸린 비닐 조각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마음속에 당시 생각이 사무쳤나 보다. 북장대지까지 가는 길은 아주 순탄했다. 성벽도 나지막하다. 이런 점으로 보아 마사리 쪽에서 오는 적을 대흥 쪽에서 막으려는 목적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 성은 처음에는 신라의 군사를 막기보다 서해로 들어오는 당이나 고구려의 군사로부터 수도인 사비성을 방어하려는 목적으로 축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북장대지는 임존성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대흥 저수지와 대흥면 소재지가 다 내려다 보였다. 임존성은 봉수산에 쌓았다고 해도 봉수산 정상은 조금 떨어져 있다. 어떤 이는 북장대지를 봉수산 정상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봉우리에 정상석이 있다. 임존성은 2천450m의 테메식 산성이지만 골짜기를 안고 있으면서 테를 지은 성이다. 그래서 골짜기 안에 우물지라든지 건물지를 품고 있어서 마치 포곡식 산성으로 보일 수도 있다. 산의 봉우리를 가운데 두고 테를 두른 산성이 아니라 산 능선을 따라서 아래쪽으로 내려와 빙 둘러 쌓은 형태이다. 대전의 계족산성과 비슷한 형태이다. 그러나 계족산성은 정상부에서 산기슭으로 흘러내린 형태이지만 임존성을 마치 골짜기를 싸안듯이 쌓은 산성이다. 그래서 성 안에서 사람들이 거주했을 수도 있는 모습이다. 공주의 공산성과 유사한 형태라고 보는 것이 좋겠다.

이 산성은 백제가 무너지고 나서 부흥군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고 고려시대에는 몽고와 대결의 장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임존성은 참 많은 이야기를 안고 있다. 숨은 이야기 속에서 우리 민족의 저항 의지와 삶의 애환을 되찾아 새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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