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연구원 연구위원

34년. 인생에서 7할이 훌쩍 넘는 시간이다. 그동안 두려움과 분노와 갈등과 이해, 그리고 측은함으로 보내온 시간들이었다. 지난 주 병상에 계셨던 어머니가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처갓집 행사로 멀리 여행을 떠나 있던 터라 임종을 지켜보지도 못했다. 부랴부랴 여행 일정을 정리하고 저녁에나 되어 요양병원에 도착해서 마주한 어머니는 어릴 적의 무섭고 고함치는 모습이 아니라 너무나 작고 가벼우며 애처로운 얼굴이었다. 손은 싸늘해져 있고 눈을 감은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다. 그렇게 보호자를 확인하고 어머니는 장례식장으로 옮겨졌다.

9년. 필자의 인생에서 3할도 안 되게 함께한 시간이다. 기억에 남는 풍경은 크리스마스이브에 친모의 무릎에 앉아 마당 한켠 두엄 위 이불더미에서 타오르는 불길, 그리고 선생님한테 호되게 벌을 받고 난 다음날 항의하러 아들의 담임 선생님을 찾아 교실 의자에 앉아 있는 뒷모습이다. 그 짧은 기억만을 남기고 친모는 어린 자식들을 떠나셨다. 그리고 22년이 지난 후에 역시 죽음의 소식으로 필자를 찾아왔다. 반나절을 고민하고 난 이후에야 장례식장으로 찾아갔다. 필자에게는 하나만으로도 벅찬 어머니가 둘이나 있었다. 세상에 나아준 친모는 아버지와의 불화로 필자가 9살 무렵 집을 나가셨고, 4년 후에 새 어머니가 오셨다. 중학교 1학년 어린 나이에 새 어머니의 폭언과 술주정은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삼일이 멀다하고 아버지와 싸우고, 술이 곤드레가 되어 마을 어귀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다는 얘기를 들어야 했다.

그러면 필자는 동생과 함께 리어카를 끌고 어머니를 모시러 가야 했다. 그때 정확히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어머니가 이대로 영원히 깨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머니는 여지없이 깨어나서 같은 일을 반복했다. 필자로서는 자살이라는 생각을 처음 하던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 대한 원망은 새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그리고 우리를 버리고 가신 친모에게로 향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친모에 대한 원망은 더 커져만 갔고, 가끔 친모가 필자를 만나고 싶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면 필자는 그 요구를 무참히 거절했다. 지금으로서는 그 거절이 가장 큰 후회로 남지만 그 당시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이제 두 번째 어머니도 가셨으니 마음 편하게 친모를 모신 납골당을 찾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어머니가 돌아가심으로 인해 생기는 여러 가지 복잡한 마음 중에 하나는 그 편안함 인 것 같다. 필자도 편안하지만 돌아가신 어머니도 이젠 세상의 걱정이 없을 터이니 더 없이 편안하시리라. 그 동안 두 어머니와 살아온 삶을 돌이켜 보면 즐거움과 행복 보다는 원망과 분노의 시간이 더 많았다. 그런데 최근 종교를 가지고 내적치유를 거치면서 원망과 분노 대신 감사의 마음이 더 커졌다. 만약 친모가 9살 때 집을 나가지 않으셨다면, 새 어머니가 술주정과 고함으로 싸우지 않으셨다면, 소개로 만난 여인들이 이런 집안 사정을 알고 교제를 포기하고 떠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지금의 필자가 누리는 행복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두 어머니는 고난을 통해 결국엔 자식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 고마운 엄마들이다. 마음껏 불러보고 싶었던 이름의 두 엄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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