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충북작가회의 회장

지난 토요일 광화문에 다녀왔다. 대통령을 끌어내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대통령이 불쌍해서였다. 한 인간으로서 사람들에게 그런 대우를 받는 대통령이 안타까웠다. 회갑도 훨씬 넘은 연세에 존경은커녕 동네 똥개 부르듯 이름이 불리어지고, 온갖 비아냥거림을 들으면서도 ‘쇠귀에 경 읽기’인 불통 대통령이 인간적으로 측은했다. 더 이상 욕을 당할 것도 없을 정도로 추잡한 치부가 낱낱이 드러났음에도 자리에 연연해하는 대통령을 보며 연민마저 일었다. 그래서 인간으로서 더 모욕적인 곤욕을 당하지 말고 민심에 따라 스스로 결단을 내려줬으면 하는 바람에서 서울로 올라갔다.

아무리 대통령 자리가 꽃방석이라 해도 인간의 존엄성과는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 똥 바닥에 앉아있어도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받는다면 그 자리가 꽃방석이요 칠보방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뜻을 귓등으로 흘리며 다 쓰러진 집을 끌어안고 있는 대통령은 일말의 자존심도 없는 것일까.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무참한 수모를 당하면서까지 똥 바닥에 퍼질러있단 말인가. 굶어죽을지언정 던져주는 음식은 먹지 않는 것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자존심이다.

여느 평범한 백성들도 잘못을 저지르면 멍석말이를 당하거나, 조리돌림을 당하거나, 팽형을 당하면 그것이 부끄러워 다시는 고향땅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객지를 전전하다 생을 마감했다. 사람들로부터 질타를 당하고 버림받는 것은 최악의 부끄러운 일이었고, 그것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얼마 전 회갑도 넘기지 못하고 선배가 세상을 떠났다. 그야말로 시골 고랑에서 흙수저로 태어나 공기업 최고경영자까지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누구도 도와주는 사람 없이 맨바닥에서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발버둥을 쳤겠는가. 그래서였는지 몇 해 전 간암 수술을 받았는데 올해 다시 재발했고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어느 날 대변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해 간병인 앞에서 실례를 하고 말았다.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자존심인 치부를 남에게 보인 그날부터 곡기를 일체 끊고 보름 만에 숨을 거뒀다. 가장 기본적인 생리현상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연명에 불과할 뿐이라고 선배는 생각했을 것이다. 이것이 인간 스스로 존귀함을 지킬 수 있는 자존심이다. 한낱 범부도 이러할진대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자신이 약속했던 말조차 손바닥 뒤집듯 어기며 국민들의 비웃음을 받고 있다. 비웃음을 넘어 능욕을 당하고 있다.

광장에서는 코흘리개 아이들조차 혀 짧은 소리로 ‘박근혜 퇴진’를 웅얼거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일국의 대통령으로서 상황파악을 못하고 자리에 연연한다면 지독한 바보이거나 부끄러움을 모르는 ‘무치’임에 분명하다. 봉건시대 왕들은 온갖 지저분하고 도리에 어긋난 짓을 저지르고도 왕이니까 괜찮다고 합리화시켰다. 그리고 백성들을 어리석은 종으로 단정해 생각도 없는 짐승처럼 대했다. 혹여 대통령은 자신이 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더 늦기 전에 인간답게 사는 길이 어떤 길인지 올바른 선택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참으로 오랜 세월, 두 부녀가 국민들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광장에 서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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