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철 수필가

“본부장님! 2번 전화 옛날 친구분이라고 하십니다.”

“네. 미래전략사업부 차동결입니다.”

“어쩜 목소리가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옛날 그대로네.”

“누구신지?”

“벌써 내 목소리까지 잊어버렸어?”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수화기 저 너머의 목소리는 약간 굵은, 전혀 기억에 없는 목소리였다.

“나, 경숙이야. 그동안 많이 승진했네.”

옛날의 나긋나긋하고 착착 감기던 그 목소리는 간곳없고 이제 허스키한 소프라노 가수처럼 변해버린 목소리의 주인공이 경숙이라니 어안이 벙벙했다.

경숙이와는 한마을에서 자랐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도 같이 다녔고, 읍내에 있는 고등학교에 통학하면서는 20리가 넘는 깜깜한 밤길을 둘이서 걸어오기도 했었다. 서울에 올라와 직장에 다니면서 야간대학 다닐 때 경숙은 은행에 취업해 나에게 적잖은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경숙은 영원히 내 곁에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서울이란 곳은 순수하고 해맑은 경숙의 머릿속에 이상한 유전자를 심어나갔다.

미국지점으로 발령받아 웃으면서 떠나던 모습을 공항 구석에서 쓸쓸히 훔쳐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었으니 허무하기만 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혼자 남은 남동생마저 미국으로 데리고 가면서 모든 연락 방법이 끊어지고 말았다. 재벌 교포 2세와 결혼했다는 소문이 들려왔지만 달리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목소리만 가지고는 알아듣지 못할 뻔했어.”

“그래,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강산이 세 번이나 변했는데 나라고 변하지 않았겠어.”

“지금 어디야, 한국에 온 거야?”

“여기 인천국제공항이야.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고 나 좀 도와줘.”

밤잠을 설치며 두 번 다시 보지 않겠다고 이를 갈았지만, 그 마음은 봄 눈 녹듯 사라지고 왈칵 그리움이 밀려왔다. 어떻게, 얼마나 변했나 보고 싶었다.

“여기야, 여기.”

경숙이는 대기실에 달랑 핸드백 하나만 들고 서 있었다. 정말 세월의 흔적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니 그 곱던 얼굴은 간곳없고 주름살이 많이 잡혀 있었다. 날씬하던 몸매도 적당히 군살이 붙어서 이제 넉넉해 보였다.

“어떻게 된 거야?”

“가방이 다른 나라로 가버렸어.”

파리공항에서 수화물로 보낸 가방이 직원들의 실수로 캐나다로 갔다는 거였다. 거칠게 항의해보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다시 돌아올 때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보다도 파리 공항에서 지갑을 날치기당하는 바람에 무일푼 신세가 된 게 더 문제라고 했다. 다행히 오면서 카드는 분실신고를 했기에 2차 피해는 막았다고 했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 머리가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제외하면.”

경숙이는 내 대머리가 신기한 듯 연신 바라보며 싱글벙글 미소를 짓는다.

“그래 서울은 어쩐 일이야?”

“남편이 한국에 지사를 내면 어떨까 하고 나를 사전 조사차 보냈어.”

“무슨 사업인데?”

경숙이가 내놓은 사업안은 거창했다.

미국에서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돕는 자선단체를 운영하는 남편이 한국에 지사를 내고 그 영역을 넓혀가고 싶단다. 자신들은 미국 선교사회의 도움을 받고 있으니 약간의 발판만 마련되면 일어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으니 도와 달라는 말도 덧붙인다.

“그나저나 지갑을 잃어버렸으니 이를 어째, 집에 데려가 한 달 동안 재워주고 먹여주든지 아니면 카드를 빌려주든지 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가 듣기에는 호텔을 예약해주던지 그냥 돈을 달라는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호텔이나 카드, 모두 찜찜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30여년만에 만난 여자 친구에게 그 어느 것 하나라도 들어주지 않는다면 나의 인간성은 낙제점을 받고도 남을 게 뻔했다.

나는 순순히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비밀번호까지 알려주었다. 카드를 선택한 이유는, 만약의 경우 사용중지 신청이나 분실신고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얄팍한 계산도 포함되어 있었다.

며칠이 지나도 어쩐 일인지 호텔 사용명세서가 날아오지 않아 물어보려 했는데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마침 친척 언니와 연결이 되어서 그 집에서 먹고 자고 있단다. 다행이었다. 하루는 만나 저녁 먹고 한강 변을 거닐었다. 그 옛날 추억의 거리를, 하지만 경숙의 뇌리에는 그런 기억이 하나도 없는지 그냥 덤덤해 보였다. 괜히 나 혼자만 들뜨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어느 날 핸드폰에 찍힌 카드 사용 명세서를 보고서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남대문의 어느 의류판매장으로 표기된 이름 아래 결재된 금액은 무려 500만원이었다. 그것도 일시금으로,

“사모님께서 아프리카 어린이들에게 보낼 옷이라고 해서 싸게 드렸어요. 그리고 옷은 택배로 바로 보내 드렸습니다. 옷에 무슨 하자라도 생겼나요?”

지극히 사무적이고 앵무새 같은 목소리의 여자가 대답한다.

“야, 동결아! 경숙이 소식 들었어?”

고향 친구 성진이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요즘 사업 준비하느라 바쁜 모양이야.”

“고향 친구들한테 사기를 치고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뭐야?”

난감했다. 성진이의 전화번호도 내가 알려주었는데 잘못되면 내 책임도 상당수 있다. 성진이도 호텔 예약해 달라고 하는 것을 카드를 주었는데 호텔은 사용치도 않고 장애인 운동기구 사들인 내역서가 날아왔다는 거다. 그날 같은 내용의 전화를 다른 친구들에게서도 받았다. 경숙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통화가 되지 않아 달리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한 통의 우편물이 퀵서비스로 배달되었다. 우편물을 뜯자 예쁘게 접힌 초대장이 나왔다.

 

초 대 장

이 지구 위에 부자가 많다고는 하나,

아프리카 검은 땅에는 지금도 굶어 죽는 어린이가 있습니다.

그런 어린이를 돕고자 하는 고귀한 정신을 가진 분들이 모여

창립의 깃발 높이 들었습니다.

후원해주시는 사랑의 온정!

저 멀리 검은 땅까지 퍼져나갈 것입니다.

부디 오셔서 축하와 격려의 말씀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일시 : 2016. 11. 20. 10:00

장소 : 검은 땅 어린이 돕기 운동본부(아래 약도 참조)

검은 땅 어린이 돕기 운동본부 서울지사장 노경숙 드림

 

망연자실 들여다보는 내 눈에 볼펜으로 또박또박 쓴 글이 보였다.

 

※친구야 후원해주어서 고마워. 영수증 곧 갈 거야. 연말정산에 사용해.

앞으로도 많이 도와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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