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숙 수필가

     
 

 만산홍엽, 고개 들어 눈 닿는 곳 마다 울긋불긋 하다. 괜시리 마음이 설렌다. 나는 유난히 가을을 타는 편이다. 그저 어디든 쏘다녀야 한다. 한바탕 돌고 나면 마음이 후련하다. 하지만 며칠을 못가 또 싱숭생숭하다. 병이지 싶다.

그렇지만 아직 그토록 해보고 싶은 혼자만의 여행은 실행하지 못했다. 올 가을이 가기 전에 한번 용기를 내볼까 한다.

혼 밥이란 말이 한동안 유행이더니 이젠 혼술이란 말까지 등장을 했다. 사실 밥이라든가 술은 누군가와 어울려 먹는 게 자연스럽다. 혼자 밥을 먹으러 또는 술을 먹으러 식당이나 술집에 간다는 것은 꽤나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우리 같은 중년 세대에 있어선.

하지만 요즘은 그런 모습을 흔히 볼 수가 있다. 편의점이나 패스트푸드점은 물론 식당에서도 혼 밥족 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처음에는 그런 사람들을 색안경 끼고 봤다. 같이 밥 먹을 사람이 그토록 없을까? 혹시 성격이 모난 사람은 아닐까?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전업주부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가끔 낮 시간에 남이 해준 음식이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럴 때 혼 밥은 누구랑 시간 약속을 한다거나 메뉴를 협상하는 번거로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 좋다. 처음에는 주변 시선을 의식하여 선뜻 용기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한 두 번 하다 보니 차츰 익숙해졌다.

하지만 혼 밥은 한 끼를 해결한다는 의미 외는 다른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다.

어릴 적 우리 집 식사시간은 늘 풍족했다. 골목길을 돌아 매캐한 굴뚝 연기가 코끝에 전해오면 곧이어 엄마가 소리쳐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두레반에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오빠 그리고 나와 동생까지 둘러앉았고 또 다른 4인상에 엄마 큰언니 작은 언니가 앉아 식사를 했다.

할아버지는 어린 손녀들을 위해 생선 가시를 발라 주셨고 어른들은 집안의 대소사를 의논하기도 했다. 밥상머리는 또한 사소한 예의범절을 배우는 자리이기도 했다.

달그락 거리는 수저 소리는 두런두런 가족들의 대화와 어우러져 멋진 화음을 이루는듯했다.

반찬이 그리 고급스럽지 않았어도 식사시간은 언제나 행복했다. 행여 맛있는 반찬에 철없는 동생과 내가 바삐 젓가락을 들락거리면 엄마의 눈총이 따랐고 할아버지는 반찬그릇을 앞으로 당겨 주셨다. 누군가의 출타로 행여 빈자리가 생기면 그 허전함이란….

바쁜 시대, 무엇이든 빨리 처리해야 하고 시간과 돈이 정비례하는 시대이다. 스마트 폰 하나면 모든 것이 불편함 없이 해결되고 혼자 시간을 보내는데도 무리가 없다. 사람들은 상대방과 일상생활을 하기보다는 스마트 폰이나 컴퓨터와 보내는 시간이 훨씬 많아졌다.

식품업계나 식당들은 혼 밥족들을 위한 메뉴나 상품을 발 빠르게 출시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의 매출이 오르고 있는 것은 일인가구가 늘어난다는 이유도 있지만 사람들은 점점 혼자만의 자유를 즐기고 있음도 이유의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모난 돌은 태풍에 깎이고 바람에 굴러야 매끈해진다. 사람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그 어떤 따스함과 비교할 수 있을까?

혼 밥을 하고 혼 술을 하고 혼자 여행을 하고 혼자 영화를 본다. 어찌 보면 이런 사람들은 남들보다 더 의지가 강하고 자신의 삶을 아끼는 사람들이다. 누군가에 종속되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끌려 다니거나 쓸데없는 시간 낭비를 싫어하는 사람들이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살아가는 모습도 변해가지만 편리함을 추구하면서 어쩔 수 없이 잃어가는 것들은 어떻게 되돌려야할까?

쇼핑을 마치고 백화점 푸드 코트에서 음식을 주문해 창가자리에 앉았다. 반대편 빈자리에 가을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고 있다. 누군가가 앉아있어야 할 그 곳에 가을햇살에 잠시 자리를 내주는 것도 꽤 괜찮은 일이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은, 아쉽지만 추억으로 남겨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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